정부나 중앙은행이 발권한 법정화폐만이 돈인가? 이런 질문을 배경으로 대안화폐 담론이 돌출했고, 심지어는 화폐종말론까지 오르내린지가 꽤 오래다. ‘법화’(法貨)를 불합리한 가치 왜곡이나 폭력적 자원배분의 원흉으로 보는 ‘아나키’한 진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젠 SNS나 이베이, 아마존 등 웹기반 거래 플랫폼이 등장하며, 범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페이스북의 리브라가 지난 해 출현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대안화폐가 더 이상 허황된 가설이 아니게 된 것이다. ‘설마’했던 것이,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를 대안적 가설로 승격되었다고나 할까.
최근 리브라를 둘러싼 미 의회 청문회도 그랬다. 의원들이 돌아가며 리브라를 난타했지만 오히려 그런 가설의 현실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자리에서 의원들은 “왜 굳이 돈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법정화폐 질서를 어지럽히느냐”고 나무랐다.
이에 페이스북 임원들은 모두 “리브라는 돈이 아니다”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되레 강한 긍정이라고 할까. 페북 책임자들은 의원들 질문에 대한 답변마다 꼭 토를 달았다. 결제수단일 뿐이지만, “기존 디지털 화폐의 변동성이 크다”며 화폐 구실을 할 수 있음을 짐작케 했고, “법정화폐로의 환전을 막겠다”며 환전할 수 있음도 내비쳤다. ‘월급’을 리브라로 받을 수 있다고 해, 화폐로서 교환과 가치 측정 능력도 사실상 인정했다.
그러면 과연 대안화폐가 가능할 것인가. 나아가서 대안화폐는 어떤 것이며, 그게 필요한 것인가 등의 궁금증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국가와 공동체가 아닌, 소유당하지 않는 존재로서 ‘개인’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경제 공동체적 자본주의와는 별개의 ‘개인자본주의’가 가능하고, 그로부터 화폐의 혁명적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상업자본주의나, 산업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개인자본주의는 지능혁명에 의한 초인적 능력의 ‘증강 개인’(augmented individual)이 주도하는 것이다. 굳이 산업이나 상업 시스템이 필요없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업이 되고, 자본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업이자 개인’들이 교환, 저장, 거래의 수단으로 네트워크상의 자율적인 승인을 통해 화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국가는 유일한 주체가 아니다. 시민이 국가 바깥에 세우는 무한히 많은 연합체 내지 주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장 마리 게노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만인에게 통용되는 지불과 거래 도구도 가능하다”는 발상도 유효하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의 속도라면 멀지않아 물물교환 수준을 뛰어넘는 대안화폐가 통용될지도 모른다.
이미 지금도 대안화폐 출현의 충분조건을 갖출 태세가 확연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계약의 가치를 비교하고, 교환이 가능하다. 사회적 네트워크상의 사이버 행동을 통해 평판이 형성되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망도 빠르게 구축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다양한 수준의 사회적, 경제적 승수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소스코드를 통해 거래의 신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블록체인이 그것과 가장 가깝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정치적 통화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교환 매개체에 그치지 않고, 부의 불평등과 권력의 왜곡, 소수에 의한 돈의 순환 장애를 유발해왔던데 대한 질타가 줄곧 이어져왔다. 이럴 바엔 아예 통화 생태계를 바꾸자는 것이 대안화폐론의 본딧말이다. 거기에 이런 저런 ‘코인’이 맞장구치며 등장했고, 급기야 인류의 3분의1을 가입자로 둔 페북의 리브라가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통화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근세와 현대를 지배해온 국민국가의 해체도 상상할 수 있고, 분산에 의한 탈권위적 신뢰라는 4차산업혁명의 비전과도 맞닿는 대목이다. 그래서 앞서 페북 임원들의 답변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그들의 궁색한 말꼬리 하나하나는 역설적으로 훗날 법정화폐의 종말을 예견하게 하는 묵시로 읽힐 수도 있겠다. 리브라는 별자리 중 ‘천칭자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곧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가 가지고 다니던 정의의 저울대를 말한다. 과연 그런 이름값을 할 만한 화폐가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장차 정의로운 통화 생태계의 저울대가 될 것인가. 긴장하며 두고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