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와 로봇, 사물인터넷 등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인간’이 작동할 수 있을까. 일과 사람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기계와 기술에 의해 인간 행복의 총량이 과연 늘어날 것인가. 순간 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은 자연스레 이런 의구심을 갖게 한다.
다행히도 최근의 클라우드나 AI와 같은 IT기술의 여백에선 그런 인문학적 의구심을 다소나마 덜어줄 것 같은 문법이 보이기도 한다.
쿠버네티스와 이와 병렬하는 서비스 메시에서 그 비슷한 가능성을 목격할 수 있다. 쿠버는 클라우드 문명이 매끄럽게 순환하도록 기름칠을 한 존재다. 좀 과장하자면 클라우드 네트워크 행위를 주관하는 독보적 존재라고 할까.
하지만 그런 쿠버도 한계는 있다. 수많은 마이크로서비스 인스턴스를 순차 순환 방식으로 일일이 검색하고 조율하다보니 속도나 정확도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한창 뜨고 있는 서비스 메시다. 이는 빠른 네트워킹의 발목을 잡는 인스턴스를 과감히 차단하고, 분산시키면서 쿠버를 보조한다. 그 외에도 쿠버가 못다한 기능을 대신 해낸다. 그래서 보조라기보단, 허점을 보완하고 협업한다고 해야 옳다.
AI도 마찬가지다. 인간 자신이 만들어놓고 그처럼 경계해 마지 않는 대상이 AI말고 또 있을까. AI가 나중엔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건 물론, 인류세의 새로운 주인이라도 될 것처럼 전전긍긍한다. 이 즈음엔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AI의 도움으로 인간의 능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는 ‘IA’가 그런 역발상의 발상이다. AI의 도움으로 인간지능을 확장하고, 초능력 수준의 인간증강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AI를 도구로 활용하거나, 일의 파트너로 협력케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크게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 사회는 AI가 아닌, IA의 시대”라고 전망하는 사변가들이 많다.
인간과 기계 간의 인터페이스(HMI)도 그런 개념의 기술과 인간의 화합 모형이다. 인간이 기계를 자신의 맞춤형 도구로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기술 낙관론의 아류다. 장애인은 자신에게 맞게 개조되는 HMI를 향유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도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거의 초인적으로 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술 덕분에 상상만 했던 비현실적 편의를 현실화한 ‘디지털 휴먼’도 맥락은 같다. 이는 그야말로 ‘디지털 인간’으로 격무와 위험, 3D의 험한 일을 대신 떠맡아 준다. 경찰관이나 의사의 조수 노릇도 하고, 지각이라도 할 것 같으면 내 역할을 해줄 ‘디지털휴먼’을 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고 했던가. 인간과 기술의 함수도 그럴지 모른다. 아직은 섣부른 전망일 수 있으나, “로봇과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이란 단편적인 조바심보다는, 인간이 기계와 기술의 동역자로서 협업하고 동거할 만한 여지는 차고 넘친다. 쿠버와 서비스 메시처럼 기술 상호 간에도 공존과 병렬이 가능한데, 하물며 인간과 기술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 같다. 서로 기대는 듯한 사람 ‘인(人)’의 형상처럼 사람 간은 물론, 인간과 기계와 기술도 기대어 사는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그게 디지털 혁명이 추구하는 전범(典範)일 것 같기도 하다.
실제 애플을 보자. 이 회사는 전 세계에 750여 협력업체가 있다. 인간과 인간 빅데이터의 연결과 축적, 그로부터 인공지능의 진화로 구성한 피드백이 작동한 결과 구글 자동번역기가 열리고, 알파고 대국 데이터나 IBM ‘왓슨’, 페이스북 얼굴인식시스템 등이 출현했다. 모르긴 해도 이들 모두는 4차산업혁명의 강력한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듯이, 모든 기술적 결과물은 인간이 기술이 연대하고, 기술과 기술이 병렬하며 전승한 결정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쿠버니 서비스메시니, 혹은 IA, 디지털휴먼이니 하는 것들도 그런 반경에 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후에 다시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사회학자 네그리가 말한 ‘사회적 공장’의 동업자란 편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