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경제가 시스템 반도체 소동으로 시끌벅쩍하다. 인텔의 비메모리 반도체 발주가 어느 쪽에 가느냐에 따라 이 분야 세계 1위인 TSMC와 2위 삼성전자의 운명에 큰 금이 갈 수도 있다 싶은데, 한켠에선 또 다른 소식도 들린다. 역시 비메모리인 자동차용 시스템 반도체가 부족해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이 생산을 중단했다고 한다. ‘코로나19’와 그로 인한 비대면 기술 수요 탓에 시스템 반도체가 귀하신 몸이 되고, TSMC나 삼성전자의 브랜드값도 한껏 치솟는 형국이다. 그러나 여기엔 자칫 간과하기 쉬운 여백이 있다. 두 기업 모두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도, 말이 좋아 위탁생산이지 어디까지나 하청업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를 비교우위와 국제분업이라는 현대 무역질서의 표본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세계적 기업을 자부하는 삼성전자가 하청업체라니-. 더욱이 대만의 국력을 쏟아붓다시피한 TSMC도 인텔 등의 일개 협력업체로 명명하면 또 어떨까. 이 대목을 다시 곱씹어보자. 시스템 반도체가 분명 디지털 지능의 핵심기제이되, 그것으로 다시 구성되고 조직되는 완제품을 위한 ‘부품’임은 부정할 수 없다. 삼성이나 TSMC는 하청에 따라 그것을 만들어 완제품 업체에 공급하는 ‘파운드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작 더 재미를 보는 건 누굴까. 다름아닌 시스템 반도체를 소재로 디지털 SW나 그 원리를 설계하는 업체들이다.

다시 말해 인텔, 애플, 앤비디아, 퀄컴 등은 시스템 반도체의 진짜 수혜자들이다. TSMC와 삼성전자의 부지런한 소재 가공에 힘입어 이들은 고도의 자본수익률을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파운드리에서도 세계 1위 경쟁을 벌이는게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 시스템 반도체 생산의 강자가 IT기술을 자양분으로 한 디지털 경제의 강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문명이 산출한 막대한 부(富)를 놓고 보면 실속이 덜한, 남좋은 일 한 셈이 된다. 반면에 반도체 설계 기업들은 고도의 부가가치를 통해 디지털 혁명이 산출해낸 천문학적 규모의 차액지대를 마음껏 향유하는 임자가 된다. 심하게 말해 ‘껍데기’가 아닌, ‘알짜’의 승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먹는다는 식’으로 비유할 것까진 아니다.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경지다. 그러나 그것의 쓰임새를 미리 설계하고 그 용도를 예정하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다. 어쩌면 반도체 설계는 4차산업혁명의 열매를 독점할 것이라는 ‘슈퍼리치’ 내지 애그리게이터의 강림일 수도 있다. 반도체 설계는 디지털 문명의 알고리즘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계량화하며 예정하는 것과도 닮았다. 전문적인 것과 보통사람의 비기술적인 것 모두를 융합하며,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내는 대중역학의 구현자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실질적인 디지털 혁명의 주역은 그들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다. 앞으로 닥칠 신세계의 뉴노멀을 설정하는 것은 반도체하고도 설계 분야다. 애초 설계란 것이 곧 삶의 모양과 텍스트를 구상하고 조직하는 것이듯, 디지털 세상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술 지형과 삶의 법칙 역시 생산이 아닌 설계에서 비롯된다. 나노와 극초 단위로 움직이는 기술문명에선 더욱 그러하다. 좀 거창하게는 문명을 정의하고 규정하며,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는 제네시스의 역할이다. 우리의 지능형 산업의 비전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선후 다툼을 벌이는 것도 물론 평가할 만은 하다. 그러나 더욱 광폭의 미래를 감당하려면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반도체 설계 분야, 즉 특정한 디지털 문명 이기(利器)를 조준한 맞춤형 기술을 설계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예하 반도체 기술과 소재는 부속품으로 적극 활용하면 된다. 반도체 설계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은 미래를 선점하는 또 하나의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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