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입사시험 떨어졌다. 차라리 잘 됐다. 됐더라면 장거리 출퇴근할 뻔 했다”, “페이스북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좋은 기회였지만 새로운 모험을 시도해야겠다”

여느 취준생들에게서 봄직한 SNS 넋두리다. 브라이언 액튼과 얀 쿰, 이 두 청년은 2009년 페이스북과 트위터 입사 시험에서 낙방한 뒤 이런 낙담섞인 메시지를 날린 뒤 다시 절치부심했다. 그리곤 ‘왓츠앱’을 창업, 큰 성공을 거두었다. 5년 후 페이스북에서 왓츠앱의 인수를 제의해왔고 두 사람은 무려 190억달러(20조원)를 받고 팔아넘겼다. 그냥 돈방석에만 앉은게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왓츠앱을 전담하는 고위 임원의 영예도 거머쥐었다.

페이스북은 애당초 두 청년을 채용하지 않았던 불찰로 무려 20조원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얀 쿰은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다. 16살에 미국 이민 후 병든 어머니와 함께 무료 급식소를 전전했고 대학을 도중에 그만뒀다. 다행히 야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액튼을 만나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태를 주고받는’ 왓츠앱을 개발했으며 마침내 세계 최대의 모바일 메신저라는 신화를 이뤘다. 쿰이나 액튼 모두 아이비리그 출신도 아니요, 와스프(WASP, White AngloSexon Protestant) 출신의 전통 엘리뜨도 아니다.

페이스북의 패착은 유망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맹점은 그 행간에 스며있는 성공과 능력의 조건에 관한 편협한 태도다. ‘기회가 평등할 때 근면 성실하게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극히 기계적인 명제, 곧 아메리칸 드림의 속물적 신화를 페이스북은 지나치게 맹신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이 야후에서 근무한 것 말곤 근면 성실한 ‘규범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 같아 떨어뜨렸다. 다시 말해 성공의 ‘싹수’가 안보인다고 생각해 물리친 것이다. 결국은 그들이 지닌 창발적 ‘여백(餘白)’의 가능성을 일축해버렸고 디지털 시대에 맞는 자질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창발적 여백은 ‘~해야 한다’는, 규범 언어와는 상극이다. “치열한 세상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근면 지상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이른바 ‘멍때리기’가 때론 맨정신보다 훨씬 생산적일 수 있다. 무심히 멍때리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인생역전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고 ‘패러디’의 달인이 인생의 달인이 될 공산도 크다. 남다른 위트와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야말로 사이버 세상을 주도할 선구자이자 슈퍼리치의 자격이 있다고 할까. 왓츠앱의 탄생 역시 그런 뒤틀리거나 뒤집힌 사고체계나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이스북의 편견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과도한 믿음도 엿보인다. 감히 단언하면 아무리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다고 해도 ‘능력’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고 능력주의는 냉혹하게 그 결과를 재단한다. 쿰이 대학을 중퇴한 것도 개인의 책임이며 엘리티즘의 이력을 갖추지 못한 것도 자기 통제의 결여 내지 능력 부족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신만이 원초적으로 만들어낸 ‘능력’이란게 있을까 의문이다. 후천적 환경과 사회적 요인, 혹은 같은 기회라도 운이 따라주는 경우 등등 변수는 많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쿰 스스로도 “왓츠앱이 성공한 것은 운이 크게 따라주었고 단순히 나의 능력이 출중해서만은 아니다”고 겸손해했다.

돌이켜 보면 왓츠앱의 성공은 직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보다 어중간한 여백의 망설임 덕분이다. 공상을 잘하는 ‘돌아이’적 기질이 그 동력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에 페이스북의 실수는 오로지 ‘능력’의 조건을 숭배하는 능력주의에 함몰된 탓이다. 오늘날 왓츠앱은 세계 최고의 모바일 메신저로서 전세계에서 10억명이 넘는 사용자를 끌어모으고 있다. 경쟁력보다는 공상력, 그리고 운과 기회가 모두 따라주었다는 쿰의 재산은 약 11조원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이 능력때문만은 아니라고 믿어설까. 쿰은 여전히 페이스북 본사 근처, 왓츠앱 시절의 허름한 창고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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