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파이썬의 런타임을 최적화한다는 피스톤2.0이 출시되었다. 이는 기왕의 파이썬3.8은 물론, C파이썬도 대체할 만큼 거의 만능에 가깝다. 대체 수준이 아니라 C파이썬 API와 더욱 편하게 호환되고 플라스크나 장고CMS 등 워크로드 메모리 소비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쯤 되면 막강한 C나 C++는 물론, 언어 시장의 선두주자인 자바스크립트의 권위마저 위협할 판이다. 물론 아직은 성급한 예단일 수도 있지만, 분명 주목할 게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급진적이되 필연적인 변천상이 마치 생물체에 대한 생명과학적 인식의 갈래들과도 닮았다는 사실이다.
우발적 산출은 우연이 작용하지만 적정한 선택은 필연이 개입한다고 할까. 그런 인과론적 생성의 공식을 이들 언어 변천사에 대입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포트란이나 코블, 베이직의 기계어로부터 어셈블리어를 거쳐 C언어 등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그렇다. 컴퓨터라는 신문명의 기기는 이전 시대를 지배했던, 자연에 대한 ‘마술적 사유’를 대부분 파괴시켰다. 그런 파괴의 첫 번째 주역이 1950~60년대의 기계어였다. 곧 인간의 의지를 컴퓨터가 해독하도록 어셈블러와 컴파일러에 의한 0과 1의 이진법적 수사로 나타낸 것이다.
기계어는 일단 자연과 사물의 요소를 인식하고, 실체적 존재로 표출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물리현상을 이진법적 사유로 치환해 오늘의 디지털 문명을 선사한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기계어의 흑백 논리와 같은 셈법은 무한에 가까운 세상 만사와 현상을 설명하고 처리해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70년대 이후 차례로 쏟아져 나온 프로그래밍 언어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났고, 이젠 고전이 되다시피했다. 대신에 디지털 문명의 화려함만큼이나 복잡한 지능의 프로그래밍 언어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 언어는 디지털화된 문명의 작동을 실시간으로 견인하고 있다. DB가 곧 경쟁력인 시대에 조금이라도 빨리 찾고자 하는 정보를 정확히 추적해내기 위해 SQL이 등장했고, 비슷한 시기에 지구촌 보편의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할 C도 개발되었다. 유닉스 운영체제를 작성하기 위한 C는 다시 그로부터 수 년 후 C++로 진화하며, 위력을 과시했다. C++는 오늘날 수많은 운영체제나 브라우저, 게임의 핵심 언어로 공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더욱이 이는 객체지향형의 언어로서 클래스, 연산자 중복, 가상 함수 등에도 능해서 지금도 막강한 스테디셀러로 군림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등장했던 이들 언어는 종래 기계어에 대한 ‘이성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연산 대상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들에 대한 환원론적 태도를 부정한 것이다. 기계어의 셈법은 규명하려는 요소의 목록과 그 각각의 기능을 확정짓기만 하면 됐다. 그것으로 상위 수준의 결과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유추했다. 그런 인식론적 오류를 혁파하고, 고민한데서 고난도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당시 개발자들의 사고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디어 자바가 1995년 출현하면서 언어기술은 최고도에 달하게 된다. 이는 그때까지 등장한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를 단번에 제압해버렸다. 오늘날도 많은 개발자들이 자바를 사용하여 모바일이나 웹 애플리케이션, 게임, DB기반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그러나 잠시 후 등장한 자바스크립트는 그러나 프로그래밍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아예 앱의 프런트엔드에서 대화형 웹을 만들거나, 게임을 만드는 데도 유용하다. 처음 등장했을 때 사용자들로선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 자바스크립트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 파이썬이다. 파이썬은 AI 앱에 적합한 오픈소스로서 AI시대의 취향을 저격한 언어다. 머신러닝이나 데이터 경제가 강조되면서 이제 ‘피스톤2.0’으로 그 성능을 최고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자바와 파이썬, 자바스크립트에 이르러선 프로그래밍 언어가 거의 유기체적 도구로 승격되고 있다. SW나 앱을 통해 작동하려는 세상 만사와 만물에 대해 그 창발적 특성까지 포착해내는 것이다. 심지어 복잡한 질서 체계의 유전현상과 역사적 성격까지 발췌해낸다고 할까. 좀 과장한다면, 어떤 대상에 대해 이진법적 사유로는 좀체 발견되지 않는 ‘원형질’과 같은 실체를 해명하며, 생기론(生氣論)의 차원으로 비화하고 있다. 마침내는 인간의 자연어 못지않은 고도의 지능을 향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경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스톤 2.0 출시를 보면서 더욱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