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이젠 가전제품처럼 생필품이 되고 있다. 수급 균형과 상품 거래 질서가 강조되는 재화로 환원되어 소비되고 있다. 정부에서 AI윤리준칙을 공표하자, 소비자단체도 아예 ‘인공지능 소비자 권리장전’을 선언하고 나선 것 또한 그런 조짐으로 읽힐 법하다. 그런 마당에 일자리를 둔 AI와 인간 간의 헤게모니 쟁탈론은 이제 유통기한이 임박한 담화로 치부되기까지 한다. 어차피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건데, 차라리 그 정체나마 제대로 알자는 각성도 일고 있다. 아예 그것의 ‘뉴런’을 해부해보고, 인간과 화해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알다시피 AI의 학습원리는 ‘비교’다. 수많은 명제에 대한 해답, 즉 레이블에 대해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혹은 규칙적이냐 아니냐 따위를 비교해서 절대적인 기준에 맞춰 분류되도록 한다. 과거의 유사한 ‘패턴’과 비교하거나, 이미지로 만들어 비교해보고 특성화(featuring)하곤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입력하기에 따라 예상되는 출력값에 대응시키는 규칙을 만들고, 그것의 재료가 되는 많은 데이터로 학습시킨 결과가 그것이다. 그런 패턴을 계열화한 것이 인공지능이다. 계열화를 스스로 알아서 하는 단계가 되면, 가공할만한 지능을 갖춘 비지도학습 머신으로까지 진화된다. 잃어버린 잠수함을 찾는 ‘베이즈 규칙’이나, 오늘날 자율주행차를 가능하게 한 자율지능은 그 직전 단계의 기술로 보면 된다.

물론 인공지능의 앞날은 아직은 불투명하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확정된 낙관이나 비관도 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과 AI, 그리고 사람의 함수는 딱 잘라 얘기하기엔 너무나 유기적이란 사실이다. 그 어떤 자연의 종속변수보다 복잡한 비선형(非線型)의 경우의 수가 작동하는 것이다. AI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들 간에도 그래서 저마다 예측이 다르다. 애초 인공지능은 명확하게 정의된 업무, 계량화가 가능한 업무일수록 알고리즘 설계가 용이하며, 인간의 단순 반복적 일자리를 쉽게 대체할 수 있다. 이미 AI자동화는 보편적 효용으로 산업사회에 스며들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비한 설득력있는 매뉴얼 한 가지는 짚어볼 만하다. 마치 판옵티콘 망루에서 내려다보듯, AI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보는 게 그것이다.

그 말대로라면 답이 보인다. 인간은 이제 육체적 능력이나 콘텐츠 기술보다, 복잡한 문제 해결능력, 사회적 기술, 시스템 기술의 보유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사의 복잡한 문제를 통찰하고 사회적으로 조율하는 지혜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했던가. 언젠가부터 IQ보단 EQ가 중시되고 있다면, 이젠 층위가 다른 AIQ(Artificial Intelligence Quotient, 인공지능지수)가 필수라고 하겠다. 고도의 AIQ로 AI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AI에 깔린 원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어떤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인간 특유의 인문학적 알고리즘을 연마한 바탕위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성찰도 필요하다. 그러면 AIQ도 높아진다.

고도의 AIQ는 곧 디지털 능력이며, 그런 능력자는 궂은 일, 어렵고 따분한 일을 AI에게 맡기면 된다. 경우에 따라선 AI를 착취하고, 그 부가가치만을 가로채면 된다. 그럼 ‘인간은 놀기만 하려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기계에 맡기는 건 노동일뿐, 모든 인간적 활동은 다시 회복된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인으로 부리면서, 먹고살기 위한 노동에 소유당하지 않고, ‘인간’임을 확인시키는 존재론적 노동에 충실할 수 있다. 아예 일과 사람의 패러다임이 근본에서부터 바뀌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AIQ는 그처럼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 될 것이며, 인간 능력평가의 척도가 될 것이다. 초연결의 커넥토피아를 교정하고 다시 고쳐쓰는 퇴고(推敲)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지수도 된다. 그렇다면 당신의 AIQ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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