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자동화와 RPA는 과연 최종의 ‘킬러앱’인가. 애초 RPA는 단순 반복 작업을 없애고, 조직의 생산성을 크게 높여준다고 해서 ‘시대의 총아’로 부상했다. 더욱이 AI자동화는 아예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하고, 조직이나 집단에 최대의 효용을 안겨주는 비장의 무기로 신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최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그럴까?’, ‘정녕 테크노피아로 가는 최종 선택이 맞나?’하는 회의가 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뛰어넘는 기술만능의 질서에 인간의 행복을 의탁할 것인가’라는, 존재적 질문과도 멀지 않다.
RPA의 도구 역시 ‘컴퓨터’라는 기계다. 기계가 반복 ‘작업’을 모니터링하고, 그 작업을 자동화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AI 프로세스 역시 자동화 생태계가 좀더 지능화된 것이다. 머신러닝을 활용해 좀더 능동적으로 비효율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더 나은 품질의 프로세스를 인간이 착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기술에 정통함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로봇자동화에 필히 AI기술을 접목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요즘엔 비구조화된 데이터까지 그 체계를 이해하는, 인간과 흡사한 ‘인지 로봇’의 출현까지 갈망하고 있다.
그러면 다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RPA나 AI프로세스를 추구하면 시간과 비용을 아끼며, 조직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까? 기업과 개인에게 최대 다수의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이에 답하려면, 먼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 기계가 ‘모니터링’하고, AI가 찾아내며 이해해야 할 대상, 곧 ‘작업’이다. 그 ‘작업’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다. 비구조화된 데이터, 혹은 비지도학습과 애드리브의 기계학습도 마찬가지다. 구조적이지 않을지언정, 카오스적 삶의 질서를 데이터링한 인간의 작업에 기초한 것이다. ‘비지도’의 애드리브 경지에 오르기까지 활성화시키며 기계를 지도해온 것 또한 인간이다.
그런 각성이 없다면 어떠한 기계만능의 방법론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설까. 이미 AI프로세스 직전 단계의 RPA는 그 평판이 예전만 못하다. 한때 그것을 ‘신’처럼 떠받들던 자동화 추종자들마저 이젠 “그 효능이 극대화하기 위해선 인간이 개입하고 협업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체념쪼의 진단은 개별 기업에 이르러선 ‘자동화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에까지 이른다. 그 해답과 해법은 역시 인간의 충실한 ‘개입’ 여부다.
여기서 새삼 기술자본주의의 삭막함과 변주되어야 할, 인간적 덕목에 눈을 돌리게 된다. 공감과 협업, 상호호혜적 효율 등이 그런 것들이다. 기술만능 시대를 예견한 듯, 에릭 프롬도 ‘인간성’을 특히 강조했다. 인간성의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 등 능동적 존재성을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마치 자동화에 앞서 그 조직과 구성원의 ‘능동적 존재성’을 먼저 분별하라는 말로 들릴 법도 하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RPA든, AI든간에 그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화합과 공감이 먼저다. 왜 자동화를 해야 하는지, 자동화함으로써 나의 존재적 삶에 주어진 이익이 무엇인지, 내가 조직과 회사에 어떤 동기로 충성을 할 것인지가 먼저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모든 조직이 ‘칸막이’를 넘어 소통하며, 기꺼이 자동화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준비할 것이다. 기계가 프로세스를 그저 모방하기보단 문제점을 포착하고 개선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일하는 사람 모두가 ‘기계를 부하로 둔 팀장’으로서, 기계의 능력을 100% 착취해내려 애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 AI자동화 역시 인간과 유리된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효용’과 같은 비존재(nonbeing) 양식이 아니라, 인간 본질에 충실한 효율화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 생산, 기술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그들과 동질화되고 그 결과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비싼 돈들여 도입한 AI자동화 성공의 최고 비결 또한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