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라는 트럼프 대통령이 급기야 임기 며칠을 앞두고 탄핵까지 당하게 생겼다. 친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점거를 사실상 방관, 사주했다는 혐의다. 이런 ‘트럼프 현상’은 그러나 한편의 막장 드라마로만 치부하기엔 결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비약된 해석인지 모르나, 그 바탕엔 ‘공정성’이나 능력 제일주의라는 한 시대의 신화에 대한 혐오가 깔려있다. 그 강고한 미덕에 대한 저항이 그런 참사를 빚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은 만인의 진리다.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다. 그러나 정의론자 마이클 샌델은 다시금 그런 ‘능력주의’에 대한 탈신화적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노력은 가치를 창출하는가? 일견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하고,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하는데 대한 도덕적 의문이다. 하긴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공이 결정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자신만의 오롯한 능력이며, 노력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설사 그럴지언정 그게 꼭 정의로운 사회인가에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다. 미 의사당 벽을 기어오르는 군중들의 모습은, 엉뚱하게도 블록체인 채굴방식으로 유비된다. 블록체인에서 ‘능력주의’는 냉혹한 디지털 살생의 공식이다. 알다시피 블록체인은 한 방향 계산은 쉬운데, 역으로 계산하기는 어려운 해시함수가 그 작동원리다. 거칠게 요약하면, 블록체인은 P2P 네트워크에 접속한 노드(컴퓨팅)가 이런 해시함수로 거래를 승인하고 증명하며, 새로운 블록을 형성해가는 이치다. 비트코인 채굴 과정이 대표적이다. 채굴은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를 취득하기 위한 이익 추구행위다. 즉 해시함수 기반의 알고리즘(SHA, Secure Hash Algorithm)으로 복잡한 연산을 풀고, 최근의 비트코인 거래내역을 검증, 암호화한 후 저장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암호화폐를 받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경쟁이다.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수 천의 채굴자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알고리즘 해독과 문제 해결에 나선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답을 제출한 단 한 명의 채굴자만이 거래로 승인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채굴 ‘능력’이 출중한 한 명만이 승자가 되는 것이다. 작업증명(proof of work)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블록이 쌓일수록 풀어야 할 문제의 난이도는 높아지고, 그 만큼 바늘구멍은 더 작아진다. 선착순으로 달려드는 채굴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혹은 도전자들의 연산 실력이 늘어날수록,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그야말로 ‘능력’ 위주의 냉혹한 승부 세계가 펼쳐지는 곳, 그게 바로 블록체인 네트워크다.
요컨대 채굴은 탈중앙화, 분산화 방식의 합의에 기반을 둔 공공 합의형 규약이라고 할까. 그런 규약에 따라 문제 해결을 위한 데이터 해독이나 연산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 신뢰와 공정함을 무기로 내세운다. 노드는 블록체인의 새로운 블록을 다른 노드로부터 받아서 블록이 신뢰할 만한 내용인지 검증할 수 있다. 일단 믿을 만하다 싶으면, 내가 가진 블록체인에 새 블록을 추가한 후에 이 블록을 안심하고 다른 노드에 전파한다. 이때 전파한 블록이 더 많은 노드에게 전파되고 검증받을수록 새 블록의 신뢰도는 커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채굴이 거듭되면서 ‘공정과 신뢰’는 이익을 위한 명분일 뿐, 무자비한 승자독식의 법칙이 기세등등 지배하게 된다.
이는 분명 아날로그 시대로부터 신봉해온 ‘능력주의’의 디지털 버전이다. 허나 과연 그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었는가.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샌델의 말처럼, ‘공정하다는 착각’이 아닐까. 최근의 ‘트럼프 현상’은 월스트리트와 아이비리그, 와스프(WASP), 그들만의 능력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슬픔과 분노의 표출이다. 채굴 능력이 딸려 낙오한 노드 집단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노 서린 눈물이 켜켜히 쌓이는 세상은 효율적일진 모르나, 공동체의 수명을 보장하는 ‘공동선’의 수행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만명이 아닌 만인을 위한 정의는 과연 불가능한가. 나카모토 사토시에게도 그런 착잡한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