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자명한 진리’란 없다. 더욱이 ‘디지털 혁명’을 말하는 오늘의 기술 지평에선 말할 나위조차 없다. 발칙하고 돌발적인 상상력과, 깊이있는 사고, 기존의 이치와 원리에 대한 까탈스런 질문, 그리고 만물의 본성에 대한 의심까지 합해서 디지털 기술은 진화하고 발전한다. 2020년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IT와 ICT의 모든 각론과 말단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화라기보단 우생학적 진화라고 해야 맞다. 어제 나온 기술이나 작동 원리도 오늘 아니면 내일엔 구태가 되거나, 새로운 발상에 의해 뒤로 밀리곤 한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의 공식이 작금의 기술세계에선 매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디지털 세상을 압도하며 풍미하고 있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운명 또한 그렇다. 클라우드가 등장하면서 이젠 지구 반대편과의 소통은 사실상 동시(同時)라고 할, 밀리초(MS) 단위로 이뤄진다. 하지만 속도에 대한 디지털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할까. 그런 극초박빙의 시간차도 인간은 못 견뎌하며 IoT와 5G를 무기로 ‘엣지 컴퓨팅’을 선호하고 있다. 이미 한 5년 정도 지나면 네트워킹, 엣지 컴퓨팅이 클라우드 컴퓨팅을 능가할 것이라고들 한다. 기술과 인간의 다양한 조합과, ‘비트’의 변성과 이합집산을 일삼는 디지털혁명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성과 역발상의 변이는 그 뿐 아니다. IT세계의 기본이라고 할 프로그래밍 언어 시장 역시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있을 수 없다. 파이썬이 자바와 순위 다툼을 벌이며 급속도로 성장하는가 했더니 이젠 출현한지 10년 남짓한 줄리아가 파이썬의 뒷덜미를 잡고 있다. 선두 자바스크립트도 언제 그 자리를 뺏길지 모른다. 전통적인 강자인 ‘C++’나, 그 모태가 되었던 C, C++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취지의 러스트의 추격세도 맹렬하다. 비즈니스 앱 개발 세계도 비슷한 현상의 연속이다. 그 중 하나가 복잡한 코딩의 종말이다. 드래그 앤드 드롭 방식으로 일을 쉽게하는가 했더니 그것도 이젠 번거롭다고 여긴 탓일까. 아예 초보자들도 앱 기능을 만들 수 있는 로우코드나 노 코드가 요즘은 인기다.
본래 디지털 혁명은 다차원적 결합을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이 핵심이다. 기왕의 실물에 또 다른 상상력이 덧입혀져 새로운 디지털 자산으로 탄생하고, 이에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이 가해지면서 파괴적 혁신을 창출하는 것이다. 다들 결코 되돌아가선 안 된다고 했던 온프레미스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는 것도 그런 이치다. 그 동안 데이터링 속도와 공유가 높이 평가되면서 온프레미스는 ‘찬밥’ 신세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추앙받던 멀티클라우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차라리 온프레미스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기왕의 실물과 새로운 관점이 결합한 디지털 자산의 재발견이라고 하겠다.
GPU의 부상도 그렇다. 게임 영상 화질을 높이는 역할 정도였던 GPU가 이젠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장치로 부상할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 그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병렬 처리 방식에 디지털 시티즌의 시선이 집중한 결과다. 늘 익숙했지만 다소 불편했던 순차처리 방식의 CPU대신 이젠 GPU로 빅데이터를 마이닝하고 AI를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화학적 섞임, 즉 융합(convergence)의 가치와도 통하는 것이다. CPU와 GPU를 대체한다는 발상 자체가 전통적인 칸막이 문화와 가치사슬을 혁명적으로 해체하는 인문학적 실천과도 닮았다.
아직 한 해가 채 가기도 전인데, 이미 내년의 기술 트렌드에 대한 예측도 무성하다. 그 중엔 특히 눈길을 끄는 것들도 있다. 행동인터넷 기술과 개인정보 강화 컴퓨팅, 지능형 컴포저블 비즈니스, 탈공간의 IT운영 모델, 사이버 보안 메시 등이 그런 것이다. 하나같이 새롭고 이질적인 아이디어와 발상, 사유로부터 온 것들이다. 본 적없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의견이나 기술에 대한 봉건적 배제를 배제한 결과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 낯선 것들에 대한 똘레랑스(Tolerance)야말로 기술 발전과 디지털 혁명의 소스코드다. 2020년은 언어와 클라우드 세계, 데이터 마이닝에서 유독 그런 관대한 신호가 많아 다행이다. 하긴 이미 인공지능이 시, 소설을 쓰는 세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