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스법·관세·경쟁 심화 삼중 압박에 국내 반도체 전략 수정 불가피
보조금 축소·관세 현실화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 투자 전략 흔들
삼중 압박 속 기술 경쟁력만이 돌파구… HBM 주도권이 관건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로 새로운 격변기에 들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제품에 대해 최소 25%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바이든 정부 시절 제정된 칩스법(CHIPS Act)의 보조금 지급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미국 내 규제가 강화되고, 파운드리 업체 간 인수합병 움직임까지 맞물리면서 국제 통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특히 두 기업은 모두 미국 현지에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를 진행 중이어서, 보조금 축소나 고율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직접적인 비용 부담은 물론, 완제품 수요 위축과 글로벌 고객 이탈 같은 간접 피해도 불가피하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단기적인 충격을 최소화하는 한편, 중장기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다.
관세 부과 현실화…글로벌 정세도 요동
이처럼 국내 반도체 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반에도 업체 간 연대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미국은 TSMC의 첨단 공정 기술력과 인텔의 생산·설계 역량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추진 중이며, 그 중심에는 관세 부과와 같은 보호무역 조치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소 25%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으며, 이는 해외 업체들의 미국 내 공장 건설이나 제휴 강화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정세 변화는 국내 기업 입장에서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실제 TSMC와 인텔은 협력 시나리오를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미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까지 더해졌다. 여기에 중위권 파운드리 업체인 글로벌파운드리(GF)와 대만의 UMC는 합병을 논의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경쟁사들이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 고르게 생산거점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처럼 관세와 지원책 변화가 현실화되면서, 글로벌 정세 자체가 국내 기업들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
칩스법 흔들리는 보조금…국내 투자계획 '빨간불'
관세 압박과 함께 또 하나의 핵심 변수는 바로 '보조금'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공급망 재건을 목표로 도입한 칩스법(CHIPS Act)이 트럼프 행정부 들어 본격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해당 법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확충을 위해 외국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세액 공제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 정책에 따라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고, 그 전제로 각각 47억 달러와 4억5800만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새 정부의 기조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칩스법에 대해 “세금 낭비”라고 규정하며, 보조금 중심의 산업 지원보다는 세제 혜택과 민간 자본 유도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 상무부가 일부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이미 공사를 진행 중인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에 총 3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첨단 패키징 공장을 추진 중이다. 두 기업 모두 보조금이 포함된 사업성 계산을 전제로 투자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에, 지원금이 줄거나 무산될 경우 수조 원대의 추가 자금을 자체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로 인해 경영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삼성전자는 자사주 매입과 주주환원 정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 투자 여력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으며, SK하이닉스 역시 보조금 불확실성이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업계에선 “칩스법의 방향 전환이 단순한 재정 지원 축소 문제가 아니라,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축 자체가 재편되는 신호”라며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선 보조금 규모를 예측하기 어렵게 된 만큼, 투자 전략과 자금 운용 계획 전반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이다.
관세 리스크보다 더 무서운 '수요 위축'
관세나 보조금 같은 정책 변화 외에도, 반도체 업계가 직면한 또 다른 큰 변수는 바로 '수요 위축'이다. 현재까지는 관세 부과의 직접 대상에서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일부 제외된 상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향 반도체 직접 수출 비중은 약 7.5%로, 대만(약 15%)이나 중국(30% 이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이 때문에 당장의 품목별 관세 부과가 국내 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간접적인 충격은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국내 반도체가 탑재된 스마트폰, 노트북, 가전제품 등 IT 완제품은 대부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에서 조립된 뒤 미국으로 수출된다. 미국 정부가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주요 조립 거점 국가에 30~40%대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글로벌 IT 생산 비용은 빠르게 오르고 있다. 이로 인해 소비자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고, 결국 수요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반응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수요 감소가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구매량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돌아올 수 있다. 실제로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 등 주요 반도체 고객사들의 주가는 관세 부과 소식 이후 일제히 급락했다. AI 붐과 메모리 가격 반등에 대한 기대가 컸던 시점이었던 만큼, 시장의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전 세계 교역 대상국을 상대로 기본 10%의 일괄 관세를 적용하고 있어, 이번 반도체 고율 관세까지 현실화된다면 사실상 ‘이중 관세’ 체계가 작동하게 된다. 예상보다 높은 관세율이 적용될 경우, 상대국들의 보복 관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뉴욕증시에서는 보호무역 강화 우려가 반영되며 대형 기술주를 중심으로 매도세가 이어지고 있다.
기술력만이 살길…HBM 주도권 지켜야
이처럼 수요 둔화, 관세 압박, 보조금 불확실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기술력’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라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앞서 있는 국내 메모리 기업들의 경쟁력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에 HBM3와 HBM3E를 공급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HBM 생산량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기술 우위도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불확실하다. 시장에서는 하반기부터 메모리 가격이 다시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며, 서버용 반도체 수요 위축 시 HBM 수요 역시 동반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최근 HBM 공급 확대에도 불구하고 신규 고객 확대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삼성전자는 수익성 악화를 반영해 올해 투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미국 테일러 공장의 가동 시점도 계획보다 늦춰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기술력 외에도 틈새시장 공략, 고객 맞춤형 제품 전략, 전략적 제휴 및 M&A 확대 등을 통해 체질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한 미국의 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과감한 전략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