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생산 압박은 커지는데 보조금은 줄어…기업들 투자 회수 불투명
TSMC·인텔 등 생산기지 불확실성 확산…실리콘밸리 장기 전략 흔들
기술 산업 육성 의지 흔들리자 실리콘밸리 “4년 주기 정책 신뢰 못 해”

실리콘밸리 모습.(사진:블룸버그)
실리콘밸리 모습.(사진:블룸버그)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칩스법(CHIPS Act)’ 폐지를 추진하면서, 반도체 공급망에 의존해온 빅테크 기업들이 위기감에 휩싸였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은 칩스법을 토대로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AI, 클라우드, 자율주행 등 핵심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해왔지만, 이제는 생산 전략과 비용 구조 모두에서 압박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유럽을 겨냥한 고율 관세 방침까지 더해지면서 기업들은 전방위적인 부담에 직면했다.

‘칩 공급 불안정’이 빅테크의 핵심 경쟁력 위협

칩스법은 단순한 제조 보조금 정책을 넘어 미국 반도체 산업 재건을 위한 핵심 전략이었다. 지난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 주도로 제정된 이 법은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와 연구개발 투자에 527억 달러(약 70조 원) 이상을 배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텔, 삼성전자, TSMC, 마이크론 등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 공장 설립에 나섰고, AI와 클라우드 기업들도 칩 설계와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각각 자체 AI 칩(TPU, Maia)을 개발해 클라우드 인프라에 적용하고 있으며, 애플은 아이폰과 맥 시리즈에 들어가는 칩을 직접 설계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메타도 자체 서버용 AI 칩으로 생성형 AI 처리 효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이들 기업 플랫폼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 됐다.

그러나 이 칩들을 실제로 생산하려면 안정적인 파운드리 수급이 필요하다. 현재 고성능 반도체 생산은 대부분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에 집중돼 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공급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칩스법으로 자국 내 생산 기반을 확대하려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시장 왜곡’이라며 보조금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로 생산시설 건설 일정이 지연되거나 재검토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장기 전략 수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TSMC의 제조 공장.(사진:블룸버그)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TSMC의 제조 공장.(사진:블룸버그)

예측 어려운 정책 변화…기업 전략 ‘원점’

칩스법에 따라 미국 내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던 기업들도 혼란에 빠졌다. 애리조나주에 건설 중인 TSMC 공장은 칩스법 보조금을 전제로 한 투자였다. 하지만 지원이 불투명해지면 완공 이후에도 안정적인 생산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텔, 마이크론, 글로벌파운드리 등 미국 기업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내 생산 확대를 강조하며 기업들에 대한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트럼프 측은 미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TSMC처럼 미국 내 공장을 적극적으로 지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보조금은 줄이면서도 생산은 미국에서 하라는 이중적 요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과 협력하는 빅테크 기업들이다. 구글은 차세대 TPU를 미국 내 파운드리에서 생산하려 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데이터센터에 최적화된 칩을 자국 내에서 양산하려 했다. 하지만 보조금이 사라지면 생산 단가는 오르고, 초기 투자비 회수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AI, 자율주행, 클라우드, 5G 등 고성능 반도체가 필요한 산업에선 공급의 안정성이 곧 경쟁력이다. 반도체 수급이 흔들리면 제품 출시 일정이나 기술 개발 계획 전반이 지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메타가 출시 예정인 AR 글라스에 들어갈 AI 칩 개발이 지연되면 전체 기기 생태계 구축도 늦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실리콘밸리 전반에서 “미국 정부의 기술 산업 육성 의지가 불확실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 벤처투자자는 “지금은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 결정이 걸린 시기인데, 국가 정책이 4년 주기로 뒤바뀐다면 누가 미국에 투자하겠느냐”고 꼬집었다.

지난달 3월 TSMC 투자 발표 기자회견에서 웨이저자(C.C. Wei) TSMC 회장(왼쪽)과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이 악수하고 있다.(사진:뉴욕타임스)
지난달 3월 TSMC 투자 발표 기자회견에서 웨이저자(C.C. Wei) TSMC 회장(왼쪽)과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이 악수하고 있다.(사진:뉴욕타임스)

고율 관세까지 더해진 ’이중고’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방침까지 더해지며, 고성능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AI 및 데이터센터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트럼프 측은 중국과 유럽에서 수입되는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전략 품목에 대해 고율 관세를 매기겠다고 밝혔다. 명분은 ‘중국 의존도 축소’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기업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여전히 아시아, 특히 중국과 대만에서 칩을 조달하고 있다. 이는 가격, 생산 속도, 기술력 등 다양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고율 관세는 이들 제품의 조달 비용을 급격히 끌어올릴 수 있다. 예컨대 한 AI 스타트업이 대만에서 고성능 GPU를 들여와 AI 서버를 구축할 경우, 기존보다 10~20% 이상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 이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과 투자 여력, 수익성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소비자 가격도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 반도체는 스마트폰, 노트북, 자율주행차, 의료기기, 산업용 로봇 등 거의 모든 첨단 기기의 핵심 부품이다. 생산 비용이 오르면 제품 가격도 동반 인상돼 소비자 체감 물가에 영향을 준다.

비용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면 미국 내 기술 서비스의 가격 경쟁력도 약화될 수 있다. 미국 한 스타트업 대표는 “공급망을 미국으로 옮기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생산 기반이 아직 부족하다”며 “정부가 지원은 끊고 규제만 강화하는 방식은 시장을 옥죄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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