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쟁 속 미국의 ‘규제 없는 AI 전략’, 지속 가능할까
캘리포니아·뉴욕 등 AI 규제 법안 무력화 우려 확산
AI 업계 “통일된 기준 필요”…안전장치 없는 유예는 반대

미국에서 추진 중인 ‘AI 주정부 규제 유예안’이 10년간 주정부의 AI 법률 제정을 막으면서, 업계에서는 산업 성장 촉진과 관리 공백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사진은 본문과 직접 관련은 없음.(사진:미드저니)
미국에서 추진 중인 ‘AI 주정부 규제 유예안’이 10년간 주정부의 AI 법률 제정을 막으면서, 업계에서는 산업 성장 촉진과 관리 공백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사진은 본문과 직접 관련은 없음.(사진:미드저니)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미국에서 추진 중인 ‘AI 주정부 규제 유예안’이 기술 업계에 중대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 조항은 향후 10년간 미국 내 모든 주정부가 AI 관련 법률을 새로 제정하거나 기존 법을 시행하는 것을 막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세금 감면 법안에 포함된 이 규제 유예안은 AI 산업의 자유로운 확산을 촉진하겠다는 의도지만,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산업 성장을 앞당길 수단이 될지, 아니면 제도적 관리의 공백을 초래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규제 유예, 기술 속도에 날개… 책임은 어디로?

AI 산업의 최대 특성은 속도다. 자율주행, 의료 진단, 생성형 콘텐츠, 교육 플랫폼 등 AI가 들어가는 분야는 빠르게 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술 기업들은 각 주마다 다른 규제를 따라야 하는 부담을 줄이고 싶어 한다. 실제로 현재 미국 각 주에는 1,000건 이상의 AI 관련 입법안이 제출돼 있다.

AI 기업 입장에서는 연방 기준이 세워진다면 규제 대응 비용을 줄이고, 더 빠르게 신기술을 시장에 적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유예안도 이런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연방 차원의 뚜렷한 정책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주정부 규제는 막으면서도, 어떤 안전장치도 없는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앤트로픽(Anthropic)의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10년간의 규제 유예는 기술이 너무 빠르게 진화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며 “연방 기준도 없고, 주정부 대응도 차단된다면 산업은 법적 불확실성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실제 사례를 보면 규제의 필요성이 명확하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는 AI로 생성된 성적 이미지의 비자발적 유포를 금지했고, 정치 광고에 무단 생성된 딥페이크 사용을 불법화했다. 또 병원에서는 AI가 환자의 치료 필요 여부를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 같은 법들은 기술이 오용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만약 연방 유예안이 통과된다면, 이런 보호 조치도 모두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다. 주정부 입장에서는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AI 위험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놓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콘텐츠와 이미지가 디지털 공간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만큼, 시민 일상에서의 피해 사례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오픈AI가 최근 공개한 '안전 평가 허브' 관련 공식 발표문. 모델의 안전성 지표를 공유하고 향후 주요 업데이트에 맞춰 허브 내용을 주기적으로 갱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사진:X(구 트위터))
오픈AI가 최근 공개한 '안전 평가 허브' 관련 공식 발표문. 모델의 안전성 지표를 공유하고 향후 주요 업데이트에 맞춰 허브 내용을 주기적으로 갱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사진:X(구 트위터))

AI 업계가 원하는 건 자율이 아닌 예측 가능성

AI 업계는 연방 수준의 단일 기준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규제를 막자는 입장은 아니다. 앤트로픽, 오픈AI, 구글 같은 기업들은 모두 AI 모델의 투명성 확보를 주장하고 있다. 모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테스트를 했는지, 어떤 위험을 확인했는지를 대중에게 공개하자는 입장이다.

앤트로픽은 자사의 모델 관련 정보를 이미 공개하고 있으며, 오픈AI와 구글도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단일 기준이 없다면 기업 간 규제 준수 기준이 들쭉날쭉해져 경쟁의 룰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시 말해, 기술 기업도 ‘규제 완화’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관성 있는 규제’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예안은 연방 차원의 대체 기준 없이 주정부 규제만 막는 구조라, 기업 스스로도 이를 완전히 지지하진 못하고 있다. 실제로 앤트로픽 CEO는 “유예가 아닌, 기술 투명성 의무화가 필요하다”며 연방 정부가 명확한 프레임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규제가 없는 시장? 지금 필요한 건 ‘유예’가 아니라 ‘설계’

이번 유예안은 단순한 국내 정책을 넘어, 미국이 글로벌 AI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트럼프 정부는 최근 중동 지역과 대규모 AI 반도체 공급 및 인프라 협약을 체결했다. 엔비디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천억 원 규모의 AI 칩을 공급하고 있으며, 아마존, AMD, 오픈AI 등도 현지 투자에 나섰다.

이 같은 움직임은 ‘AI 동맹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반면 미국 내에서는 AI 산업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기업들의 책임 소재가 흐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AI가 국경을 넘나드는 기술인 만큼, 미국 내 기준이 사라지면 국제 기준도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미 유럽연합은 AI 규제를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자체 산업 보호를 위해 규제를 체계화하는 중이다. 이런 흐름과 비교해 미국의 ‘규제 유예’는 경쟁력이 아닌 책임 회피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AI 기술은 시장과 사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자율주행차의 판단 기준, 생성형 AI가 만드는 뉴스나 이미지의 진위, 의료 AI의 책임 소재 등은 모두 지금 당장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렇기에 이번 유예안 논란은 단순히 규제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AI 기술이 사회와 어떻게 공존할지를 정하는 방향성의 문제다. 연방 정부가 나서서 명확한 기준을 만들고, 기술 기업도 그 틀 안에서 투명성과 책임을 갖춰야 한다. 주정부는 그 기준이 미비할 때를 대비한 백업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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