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칩스법을 ‘세금 낭비’로 규정하며 보조금 중단 가능성 시사
보조금 불확실성에 기업·정치권 모두 정책 일관성 요구 목소리 커져
美 상원의장, 칩스법 폐지 반대 “미국 기술 경쟁력과 일자리 창출 핵심”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트럼프 대통령이 선언한 '관세폭탄'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세계 경제와 교역에 영향을 끼칠 사안이 있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전면 재검토 내지 폐지 움직임이다.
이에 전 세계 기술산업계, 특히 반도체 업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당시부터 이 법안을 “세금 낭비”라고 비판해 왔고, 취임 이후 관련 예산과 보조금 집행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고 시사한 상태다.
특히 반도체 공급망 재건과 첨단 기술 주도권 확보를 목표로 추진됐던 미국의 산업 전략이 다시 불확실성 속에 빠지면서 이런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이에 이미 수십억 달러를 투입해 미국 현지에 공장을 건설 중인 글로벌 기업들로선 매우 곤혹스런 상황이다.
기술 패권 경쟁 속에 등장한 ‘칩스법’
칩스법은 코로나19 이후 세계적인 공급망 혼란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산업 정책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 세계 공급망이 붕괴되며 반도체 부족 사태가 장기화되자, 미국은 산업 전반의 취약한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특히 반도체는 자동차, 스마트폰, 클라우드, 국방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핵심 부품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생산 기반은 사실상 붕괴 수준이었다. 제조 기술은 아시아 국가들에 집중돼 있었고, 첨단 공정에서는 대만 TSMC와 우리나라 삼성전자가 시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2020년 기준 미국의 반도체 생산 비중은 10%대에 머물렀으며, 미세 공정 분야에서는 글로벌 점유율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 대만은 5나노미터 이하 공정에서 90% 이상을 차지했고, 우리나라도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 생산 기반이 붕괴될 경우,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국가 안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칩스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반도체 제조시설 유치뿐 아니라 연구개발, 교육, 공급망 안정화까지 포함한 종합 패키지 법안으로 구성됐다. 산업뿐 아니라 군수, 에너지, 인공지능 등 미래 전략 분야까지 염두에 둔 설계다. 단순히 생산시설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기술 자립 기반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담겨 있다.
대규모 투자 이끌며 美 반도체 생태계 재편 중
칩스법은 실제 미국 반도체 산업에 거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법안 통과 이후 삼성전자, 인텔, TSMC, 마이크론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 내 공장 설립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천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이 쏟아졌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약 600억 달러에 달하는 민간 투자 계획이 가시화됐으며, 전국적으로 40개 이상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애리조나주, 뉴욕주, 텍사스주, 오하이오주 등지에는 대규모 반도체 공장이 새로 들어서고 있고, 지역 경제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이곳에서는 첨단 4나노미터 이하 공정 기술이 적용될 예정이며,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200억 달러 규모의 메가 팹(Mega Fab)을 건설 중이다. 공장 규모만 수십만 제곱미터에 이르며, 향후 수천 개의 고급 기술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TSMC 역시 애리조나에서 2개의 공장을 건설 중이며, 미국 내 기술 이전을 통해 3나노미터급 첨단 공정도 적용할 예정이다. 마이크론은 뉴욕에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예고하며, 미국 내 최대 메모리 반도체 제조시설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스카이워터, 글로벌파운드리즈,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다양한 중견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시설 확충에 나서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생산 설비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칩스법은 연구개발 생태계 강화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대학·연구소·기업 간 공동 연구를 확대하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R&D 예산도 배정됐다. 또한, 반도체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을 강화하고, 기술자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도 확대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칩스법 폐지’ 본격적으로 검토…정책 리스크 현실화
이처럼 미국 전역에서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가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정책이 급격히 바뀔 경우 산업 전반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대선 캠페인에서 칩스법을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고, 최근 백악관 측도 관련 예산 및 보조금 지급 계획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반도체 업계는 물론, 정치권과 노동계까지 반발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미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기업들이 당초 약속된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다. 칩스법은 장기 프로젝트 중심인 만큼, 기업들은 보조금 수령을 전제로 자금을 집행하고 공장 건설에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정부 보조금 지급은 아직 예비 승인을 받은 수준이며, 실제 집행은 늦어지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계획을 변경하거나 축소해야 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아직 심사가 완료되지 않은 기업들은 투자 결정을 유보하거나, 타 국가로 눈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유럽연합과 일본, 인도 등도 반도체 유치를 위한 정부 보조금 정책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라, 미국의 정책 혼선이 곧 기업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투자 규모도 크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분야라 연속적인 정책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법안이 폐지되면 미국은 다시 제조 기반을 아시아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산업 경쟁력과 안보 모두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칩스법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공화당 의원은 정부 보조금 규모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민주당은 국가 전략 차원에서 법안 유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는 지난달 "칩스법은 미국이 기술 및 AI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인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칩스법은 단기 정책이 아니라 10~20년을 내다보고 만든 국가 전략”이라며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책을 뒤엎으면, 미국은 다시 기술 주도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