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가 등장하면서 새삼 돈 그 자체의 ‘가치’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돈의 ‘가치’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돈의 재료인 종이조각이나 금속 자체의 ‘가격’은 얼마인가 하는 것이다. 늘 상품을 매개하는 교환가치에만 익숙해있던 터라, ‘돈의 가격’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는 디지털 화폐를 계기로 ‘화폐의 효용’에 대한 근원적 규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NFT는 기존 법화(法貨)는 물론, 비트코인같은 암화화폐와도 달리 그 자체만으로 ‘값’을 갖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변경 불가능한 디지털 서명 방식으로 교환가치를 지닌 토큰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원본’으로 확정된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다보니(nonfungible) 그 자체에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복제품이 숱하게 있을 수 있으나, 그것들은 ‘원본’과는 달리 원칙적으론 가격이 매겨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디지털 화폐시장에선 유일하게 ‘자체적인 값’을 지닌 대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교환가치보단 화폐의 실물가치를 중시했던 19C 금본위제 이전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잖아도 반(反)화폐론자 저변엔 “자본주의의 화폐는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래로 ‘가치’와 무관해졌다.”는 불신이 깔려있다. 기실 자본주의에서 상품 가격은 그것이 지닌 실질적인 ‘사회적 가치’와는 때로 무관하다. 한낱 돌덩어리인 한 톨 금알갱이의 값이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는 한줌 쌀보다 수 천배나 된다. 실생활의 효용으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오로지 그것이 갖는 경제․사회적 확증과 편향됨이 낳은 가치의 결과다. 마약처럼 사회적 손실이 큰 악성 재화가 정작 사회적 가치가 큰 재화보다 비싸게 매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화폐의 인지부조화라고 할까. 이처럼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게 화폐경제의 화폐다.

암호화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주 비트코인 거래가가 7900만원까지 올랐다곤 하나, 비트코인 자체의 ‘본질적 가격’은 없다. 그저 다른 실물에 견준, 거래참여자들의 주관적 교환가치가 그렇게 많이 올랐을 뿐이다. 흔히 최대 2100만개로 채굴량이 한정되어있어 나름의 희소가치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비트코인은 최대 1억분의 1(1사토시)까지 쪼개어 거래될 수 있다. 그게 다 소진되려면 모르긴 해도 50~100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적어도 그 자체만의 ‘가격’은 종이조각이나 동전으로 찍어낸 여느 법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법화야말로 그 본질적인 ‘가격’은 미미하다. 1달러 지폐조각이나 100원짜리 동전의 값이 얼마일까 생각해보면 된다. 중앙은행에서 찍어내는 돈은 종이조각이나 동전의 가격과는 무관하게, 실물을 구매할 준비가 된 ‘유효수요’를 대변하는 상징 조작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아담 뷰익이나 애니트라 넬슨 같은 화페종말론자들은 ‘가치주의’에 입각한 ‘실제수요’를 주창해왔다. 각자 필요한 만큼 욕구하는 ‘실제수요’에 따라 화폐없는 생산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이때 ‘가치’란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농작물, 의복, 전기, 공산품 등등이다. 단순한 매개체가 아니라 실제와 실물의 가치를 나눠갖게 하는 사실상의 대안화폐도 이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가치화폐든 대안화폐든 그 출현 여부보다 중요한 함의가 있다. 정작 수 백 년 이어져온 화폐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달리 말해 현존 표면가치 위주의 화폐경제가 과연 미래를 선점할 사회적 가치나 삶의 효용을 선사해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삶에 합당한 교환과 생산의 질서는 어떠해야 하느냐와도 직결된다. 그래서다. 7900만원짜리 비트코인의 진짜 값은? 1만원짜리 지폐 종이조각은 얼마짜리인가? 따위의 궁금중도 새삼 주목받을 때가 되었다. 그런 궁금증의 발화점이 된 것이 NF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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