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온서 구현된 양자 스핀 전류…국내서 세계 첫 실험 성공
스핀트로닉스 주목…AI 반도체·IoT용 저전력 기술로 부상
극저온 장비 없이 구현…양자소자 상용화 가능성 높인다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전자의 흐름에 의존해 온 반도체 기술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연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소비 전력과 발열을 감수하던 기존 구조로는, AI 반도체와 IoT 디바이스 같은 차세대 기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전자의 회전 정보인 ‘스핀’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스핀트로닉스’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스핀 기반 전류를 극저온이 아닌 상온 환경에서 구현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면서, 관련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이 급격히 현실로 다가왔다. 서강대학교 정명화 교수 연구팀은 철-로듐 박막을 활용해 기존보다 10배 이상 강한 양자 스핀 전류를 상온에서 생성해 냈고, 이 성과는 전력 손실 없이 신호를 전달하는 스핀 소자의 상온 동작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입증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스핀으로 여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
스핀트로닉스는 전류 대신 전자의 회전 정보를 이용해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발열 없이 작동하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이다. 전자가 이동할 때 생기는 열과 에너지 손실 없이 정보를 전송할 수 있어 차세대 저전력 반도체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자의 세차운동을 이용해 스핀 전류를 만들었지만, 이 방식은 물리적 제약이 크고 제어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정 교수의 연구는 이런 한계를 넘어섰다. 스핀 방향은 고정한 채 크기만 조절해 전류를 만드는 방식으로, 실험 결과 매우 강한 전류 흐름을 확인했다. 특히 이 기술은 스핀을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 양자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 교수는 이 기술을 통해 전자기기의 전력 효율을 높이고, 소형화된 반도체 소자 개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I·IoT 시대, 저전력 해법으로 주목
AI 반도체와 IoT 기기에는 연산 효율과 전력 소모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고성능 컴퓨팅이 필요하지만, 발열과 에너지 소모를 줄이지 않으면 실현하기 어렵다. 스핀트로닉스는 전력 소모 없이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 AI 가속기나 에지 디바이스 등 차세대 컴퓨팅 기술과 연결될 수 있다.
양자역학 기반 스핀 전류는 신호 손실이 적고, 반도체 소자의 전력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적으로 가치가 크다. 특히 이번 연구는 실험실 수준이 아닌 상온 조건에서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소자 실용화 가능성을 높였다. 전자 대신 스핀으로 정보를 다루는 개념은, 기존 논리회로나 메모리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온 구현 성공…양자소자 실용화 앞당겨
정명화 교수의 연구 성과는 학술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연구는 지난 1월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그동안 실현 가능성조차 불확실했던 양자 스핀 펌핑 현상을 구체적인 장치와 물질을 통해 증명한 점에서 평가가 높다. 특히 고가의 극저온 장비 없이도 실험할 수 있다는 점은 산업계 입장에서도 반가운 부분이다.
양자소자 기술은 기존 실리콘 반도체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힌다. 스핀 기반 소자는 빠른 연산, 낮은 전력 소모, 고집적 구조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AI·IoT 기술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상온에서도 작동하는 만큼, 실제 산업 제품에 적용될 수 있는 현실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양자소자 기반 저전력 칩 개발 본격화…투자도 이어져
해외에서는 이미 양자소자 상용화를 위한 투자가 활발하다. IBM, 인텔, 구글은 양자컴퓨터뿐 아니라 스핀 기반 소자에도 연구비를 집중하고 있다. 특히 IBM은 양자 기술을 응용한 저전력 AI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으며, 인텔도 비휘발성 메모리와 스핀 논리소자 연구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 역시 양자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기초과학과 산업 기술 간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명화 교수는 “기초과학은 정답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야 의미가 있다”며 “이번 연구가 차세대 소자 기술 발전에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도 양자과학기술 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기초연구 지원과 산업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할 계획이다.
상온에서 실현된 양자 스핀 전류는 단순한 학문적 발견을 넘어 산업 기술 구조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보인다. AI 반도체, IoT 기기, 에지 컴퓨팅 등 미래 기술의 핵심 축이 전자가 아닌 스핀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가능성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