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이 만드는 '디지털 원화'?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향방 주목
지급결제 변화와 디지털 예금 경쟁 촉진 예상
금융당국, 시장 안정 위한 감독 체계 강화 필요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정부가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을 추진하며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진입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번 법안은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 설치와 함께, 일정 요건을 갖춘 민간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해 ‘민간 주도형 디지털 원화’ 시대를 예고한다. 글로벌 주요국들이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신속히 정비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시장 육성에 본격 나서고 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왜 지금 필요한가
이 법안은 디지털자산 시장이 제도적 공백 상태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민병덕 의원은 "디지털자산은 더 이상 금융의 주변부가 아닌, 새로운 경제 인프라"라며 "주요국과 달리 국내에는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은 2020년 이후 약 세 배 이상 성장했고,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디지털 자산 기반 결제 수요도 함께 늘고 있다.
법안에는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를 통해 국가 차원의 전략 수립과 정책 조율을 맡기고, 민간 기업이 참여해 시장을 키우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특히 원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일정 자기자본 요건을 충족한 민간 기업이 금융위원회 인가를 받아 발행할 수 있게 했다. 발행 주체가 파산하더라도 이용자가 환불받을 수 있도록 도산 절연 조항도 포함됐다.
스테이블코인은 특정 자산에 가치를 연동시켜 가격 변동성을 줄인 디지털 자산이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달러, 유로, 원화 같은 법정화폐에 1:1로 고정되는 방식이다.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자산 이동과 거래를 쉽게 하기 위해 활용돼 왔지만, 최근에는 실물 경제에서의 결제 수단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방식은 준비금을 기반으로 발행하는 방식과 알고리즘을 이용해 공급량을 조정하는 방식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민간 기업이 실물 자산을 담보로 발행하며 USDC, PYUSD 등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알고리즘을 통해 토큰 수량을 자동 조절해 가치를 유지하는 구조다. 하지만 2022년 테라USD 사태 이후 알고리즘 방식은 시장 신뢰를 잃으면서, 지금은 준비금 방식이 주류가 됐다.
한국 스테이블코인, '민간 주도형'일 가능성 높아
우리나라가 선택한 구조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보다는 민간이 발행하고 정부가 감독하는 스테이블코인 모델에 더 가깝다.
먼저 법안에는 한국은행이 직접 참여하는 조항이 없다. 대신 금융위원회가 인가권을 가지며, 민간 기업이 발행 주체가 된다. 일정 자본금 이상을 갖춘 법인은 사전 인가를 통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고, 준비금 보유와 전산 시스템 안정성도 입증해야 한다.
자율 규제 체계도 민간 중심이다. 한국디지털자산업협회를 중심으로 거래소 상장 심사, 시장 감시, 불공정 거래 대응 등을 맡는다. 이는 공공기관이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민간의 자율성과 속도를 살리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민간 주도의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실제로 발행된다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분야는 지급결제 시장이다. 기존 간편결제 수단보다 낮은 수수료와 빠른 정산이 가능해지고, 해외 송금이나 디지털 콘텐츠 결제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이 확대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디지털 예금'에 대한 인식이다. 준비금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자 보호 대상은 아니지만, 디지털 화폐처럼 쓰이며 기존 은행 예금과 경쟁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 이자 지급 가능성을 두고 은행권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 국내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금융당국의 감독 체계 역시 더 정교해져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통화 정책과 금융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인가를 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유동성 관리나 소비자 보호 장치까지 함께 마련해야 한다.
해외도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속도
이처럼 국내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해외 주요국들 역시 발 빠르게 관련 규제를 정비하고 있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입법화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현재 의회를 통과 중인 법안은 민간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되, 준비금 구성 공개와 월별 회계 감사 보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테더(USDT)와 서클(USDC)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과 연관된 USD1 같은 민간 주도 스테이블코인도 등장했다.
유럽연합은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을 통해 자산 담보형 토큰의 신뢰성과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유로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민간과 중앙은행이 함께 발행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명확한 규제 프레임을 마련해 민간 기업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은행과 연계해 실거래에 사용하는 구조를 갖췄다.
정책 설계,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국내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첫 단추다. 하지만 발행 구조나 운영 기준, 회계 처리, 과세 등 구체적인 제도 설계에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민간 주도와 공공 관리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의 정체성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