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트닉 상무부 장관 지명자, 청문회서 “계약 이행 장담 못해”
한국과 일본 거론, "그 동안 미국 이용, 앞으로 미국 내 생산 늘려야”
[애플경제 정한빈 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지명자가 바이든 행정부가 체결한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 지급 계약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 계획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도 강력한 보호무역 기조를 적용할 가능성을 시사한 만큼 보조금 지급 여부뿐만 아니라 향후 무역 정책 변화가 한국 기업들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블룸버그, WSJ 등 외신을 종합하면 29일(현지시각)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 지명자는 미 연방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체결한 반도체 보조금 계약을 그대로 이행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내가 읽지 않은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법을 비롯한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산업 지원 정책의 재검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업 활성화를 목표로 2022년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법안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를 기반으로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고 각각 6조 9천억 원(47억 4,500만 달러), 6,639억 원(4억 5,800만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받기로 계약한 상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정책을 수정하거나 철회할 경우 이들 기업들의 투자 계획에도 큰 차질이 예상된다. 러트닉 지명자는 “반도체법 보조금은 미국의 반도체 제조를 다시 되살리는 데 필요한 훌륭한 착수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우리가 이를 검토해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지원 정책 자체를 완전히 폐지하기보다는 수정 또는 축소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러트닉 지명자는 인사청문회에서 한국과 일본을 직접 거론하며 미국이 그동안 동맹국들에게 이용당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철강, 한국의 가전 산업은 미국을 단순히 이용해 왔다”며 “이제는 그들이 미국 내에서 생산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기간 내내 주장해 온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 향후 미국 내 제조업 유치를 위해 동맹국에도 강한 압박을 가할 가능성을 높였다.
특히 러트닉 지명자는 동맹국들도 미국의 관세 정책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관세가 가장 높아야 하지만 동맹국들도 예외일 수 없다”며 “미국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국, 일본, 유럽 등의 주요 수출국들에 대한 전반적인 보호무역 정책이 강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도 강력한 무역 장벽을 적용할 경우 미국 시장을 겨냥한 한국 기업들의 수출 및 투자 전략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법을 기반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설비를 확장하는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약 370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47억 4500만 달러(6조 9천억 원) 규모의 보조금 지급 계약을 체결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인공지능 반도체용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며 미국 정부로부터 4억 5800만 달러(6,639억 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지급 여부를 재검토할 경우 해당 계약이 취소되거나 수정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불확실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라며 “향후 정책 변화에 따라 미국 내 투자 계획을 조정해야 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보조금 정책을 완전히 철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27일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이 ‘연방 보조금 및 대출 집행 잠정 중단’ 메모를 하달했으나 이틀 만에 이를 철회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원점에서 검토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이를 완전히 폐기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 미국 정부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이미 투자 계약을 체결한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일방적으로 뒤집는다면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통해 외국 기업들의 미국 내 생산을 압박하려는 기조를 유지할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서 기대했던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전기차 배터리 및 첨단 제조업 부문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보조금 정책 변경이 한국 기업들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계약을 취소하지 않더라도 향후 반도체법의 지원 규모를 줄이거나 추가적인 관세 정책을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며 “정책 변화에 따라 투자 전략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이 향후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