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걱정일까. 메타버스니 NFT, XR이니 하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또 다른 불길함이 엄습한다. 부디 기우에 그치길 바라면서도 그로 인해 혹여 불평등 세상과 확장된 양극화가 새로운 버전으로 반복될까 하는 것이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실물 그 이상의 실감을 선사하는 가상기술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얼리 어댑터들은 이미 잽싸게 이들을 상품화하고, 나름의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있다. 메타버스 세컨드라이프니, 라이프 트윈이니 하는 이름으로, 꿈도 생시도 아닌 경험을 만들어 팔며 돈을 벌고 있다. 그들 말마따나 가상과 현실이 연계된 하이브리드 삶을 비즈니스로 치환하며 부를 쌓고 있는 것이다.
이미 XR과 어우러진 메타버스는 익숙한 거래 수단이 되고 있다. 예술품이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실물 이상의 값어치로 거래하거나, 영화와 미술, 콘서트를 ‘메타’ 공간에서 사고 팔며 억만금을 버는 경우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덩달아 부동산 개발업자나 거간들도 바쁘게 움직인다. 봉건적 지대(地代)에 탐닉해온 전근대적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들은 걸신들린 듯 첨단의 가상기술에 관심이 많다. 걸핏하면 ‘메가’니 ‘메타’니 하는 이름을 붙여 그럴듯한 가상세계로 포장해서, 아무런 제약없이 가상같은 실물을 팔고 사는 기미가 포착된다. 그야말로 제도의 그물을 벗어난 치외법권적 이탈을 한껏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AI나 가상현실은 커녕, 3차산업혁명의 인터넷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슬로우 어댑터들이 현실에선 더 많다. 나이 든 계층일수록 더 그렇다. 클라우드, 블록체인, 사물인터넷, 암호화폐 따위도 이들에겐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존재들이다. 늘 듣기 들었지만, 정작 그 원리나 기술적 내막에 대해선 까막눈이다. 그 틈에 약삭빠른 부류들은 “메타버스 내의 투자를 통해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거나, “시공간의 제약없이 상상 속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여 돈을 벌 수 있다”며 세상을 꼬득이고 있다. 그렇게 신기술을 빙자한 콩고물을 앞서 챙기며, 돈을 긁어모으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게 요즘이다.
그렇다. 다가올 4차산업혁명 시대의 지배자는 분명 평범한 생활인들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저 당대 기술문명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그럼 누굴까? 새로운 돈벌이 기술에 밝고, 세상의 새로운 조짐들을 제것으로 이용하는 처세의 달인들이 그 지배자가 될 공산이 크다. 보기에 따라선 이들을 ‘혁신가’로 치켜세울 수도 있다. 허나 건강하며, 생산적인 공동체적 이노베이션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라면, 이들은 그저 눈치빠른 처세꾼이거나 잔머리의 귀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처세꾼들은 디지털 문명의 서자(庶子)일지언정, 잘만 되면 준(準)슈퍼리치 정도는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목전의 가상기술은 그처럼 가상의 공간을 통해 또 다시 현실의 어두운 공간을 유추하게 한다. 그 안에선 사이버 세계의 이익을 독점하는 소수의 승자와, 소외되고 배제되는 산업대중의 초상이 극단으로 구별되며 대치한다. 루저로 몰린 대다수 메타 공간의 대중은 불안정한 삶에 전전긍긍하는 ‘긱 시티즌’으로 전락할 것이며, 마침내는 절망적이고 허약한 노동자들만 양산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이런 걸 두고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클라인은 “불필요한 사람들에게 닥친 디지털 암흑시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가상기술의 운명과 효용은 분명해진다. 그 쓰임새와 작동 방식이 선하지 않을 경우, 이는 다가올 사이버 불평등의 예고일 수 있다. ‘메타’의 초월적 우주의 모순은 차별과 양극화의 영속화라는 구체적 현실의 비극을 낳게 될 징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앞에선 배분적 정의와 평등이 과연 올바르게 실현될 수 있는지, 공평하고 포용적인 성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따위의 물음은 이미 효용을 잃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게 있다. 타인의 빈곤이 나의 부의 조건이라는, 제로섬 법칙에 대한 오래된 경계와 질문이 그것이다. 현실을 초월한 ‘메타’ 시대일수록, 그 ‘초월적 질문’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