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은 살아났지만 대미 시장은 불안
삼성과 SK, HBM 시장 패권 두고 경쟁 치열,
[애플경제 김예지 기자]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지원금 조건에 기업 지분 확보까지 요구하고, 동시에 미국 내 산업 보호를 위해 EU 수입품에 세이프가드 관세 부과를 추진 중이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전체 수출의 5분의 1 이상을 책임지고 있어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국가 경제 전반이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정치적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기술력으로 버틸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K-반도체, 보조금 지분 요구와 글로벌 압박 심해
트럼프 행정부의 가장 큰 변화는 보조금 조건이다. 기존에는 지원금을 받는 대신 일정 기간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부가 직접 기업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단순한 지원 조건을 넘어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수십조 원을 들여 미국 현지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어 부담이 커졌다.
미국의 EU 세이프가드 추진은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다. 한국 기업들이 직접적인 관세 대상은 아니지만, 미국과 EU 간 무역 마찰은 글로벌 반도체 가격과 공급망 재편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런 국제 환경 속에서 미국과 EU 양쪽의 정책 변화를 주시하며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가오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가 주요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보조금 조건을 더 강화하면 한국 기업들이 현지 투자 확대와 추가적인 양보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치와 통상이 얽히면서 기업의 경영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온다.
수출은 회복했지만 미국 시장은 불안
정치적 변수에도 불구하고 한국 반도체 수출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8월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29.5% 늘었다. 전체 수출 증가율이 4.6%에 그친 점을 고려하면 두드러진 성과다. 메모리 가격 반등과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가 회복세를 이끌었다. 업계는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특히 대미 수출은 오히려 줄었다. 이는 미국의 정책 변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전문가들은 미국 내 규제 강화와 관세 부과 가능성이 현실화되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미 수출이 더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수출 총량은 늘었지만 주요 시장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는 얘기다.
기술력으로 맞서는 삼성과 SK
기업들은 정치와 통상 압박에 맞서 기술 경쟁력으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AI 학습과 추론에 필수적인 HBM 시장에서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유지하면서 테슬라·애플·퀄컴 등 주요 글로벌 고객사와 계약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연이어 수주에 성공하며 신뢰 회복에 나서는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HBM4 개발에 성공하면 시장 판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HBM3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3 대부분을 SK하이닉스가 공급한다. AI 열풍의 가장 큰 수혜 기업으로 꼽히는 이유다. 다만 미국 내 추가 투자 요구는 부담이다. 현지 보조금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업계는 SK하이닉스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가 향후 전략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본다.
글로벌 정치 환경은 앞으로도 불확실성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EU의 통상 압박은 더 강해질 수 있고, 중국 시장도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믿을 수 있는 힘은 결국 기술이다. 8월 수출 회복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삼성과 SK가 차세대 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성과를 이어간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불확실한 외부 환경 속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