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택배노동자들이 과로로 쓰러지기 일쑤다. 배달 라이더들 역시 초스피드 배달을 향해 달리다 사고를 당하거나 일으키곤 한다. 어찌보면 살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듯한, 플랫폼 노동자들의 단말마적 굉음과 질주로 가득한 비정상이 일상화된 시대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소수의 플랫폼 네트워크 지배자에 의한 ‘슈퍼스타 경제’의 세상이 아닐까. ‘4차산업혁명’이란 용어가 등장하던 무렵, 이미 그런 불길한 예언은 있었다. MIT의 에릭 브리뇰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승자독식의 네트워크 효과로 인한 테크노 디스토피아”를 경고했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창조적 애플리케이셔너 내지 혁신 기업가로 이름을 바꾼 플랫폼 소유자는 네트워크가 거둔 경제적 과실의 절대 분량을 챙긴다. 반면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저 애플리케이션이 물어다 주는 허드렛 일감을 놓고 경쟁을 벌이며, 겨우 연명하는데 그친다. 멱 법칙이나 파레토 곡선의 암담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네트워크 지배자들과는 달리, 다수 대중은 디지털 기술과 앱, AI 같은 기술주의의 객체로 전락될 판이다. 만약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에 바치는 온갖 헌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다. 일각의 전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프로토콜 경제’에 요즘 눈길이 간다. 프로토콜 경제는 기존 플랫폼 경제의 약탈적 속성을 해체하는 것이 골자다. 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만들고 지키는 규약(프로토콜), 곧 ‘약속’을 토대로 탈중앙화와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저간에는 블록체인이라는 공평무사한 도구가 있다. 블록체인 위에서 그 동안 플랫폼 기업이 독점했던 정보를 분산하고, 중개 비용을 최소화하며,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투명성과 분산화, 공유와 합의 정신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이 생기는 모든 경로나 방식, 정보가 분산되고 공유되어 플랫폼 노동자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보가 곧 돈이며 권력이란 점에서 이는 공유경제의 본질에 다가가는 셈법이다. 중개 수수료 또한 그렇다. 기존 플랫폼 경제에서는 플랫폼 사업자가 수수료를 강제하고, 거래가 증가할수록 자신의 배만 더 불리게 된다. 그러나 블록체인 위에선 이게 불가능하다. 정보 분산과 공유에 의해 플랫폼 기업의 수수료가 최소화되고, 절감한 거래 비용이 사업자와 노동자에게 적절히 분배되는 것이다.
더욱이 ‘프로토콜 경제’의 키워드는 ‘규칙(프로토콜, 약속)에 대한 합의’다. 거래 내역을 검증하고 승인하는 ‘합의 알고리즘’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모두 신뢰할 만한 규칙이 생성되는 것이다. 거래 계약이나 내역도 플랫폼 기업뿐 아니라, 네트워크 참여자 모두가 직접 확인하고 동의한다. 그렇다고 기존 플랫폼 경제를 마냥 부정하거나 대체하자는게 아니다. 단지 그 폐해를 극복하고 공정한 플랫폼 경제를 구현한다는 선의에서 나온 발상이며, 그 과정에서 디지털 시대의 총아라고 할 블록체인 기술을 유익하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정녕 ‘플랫폼 정의’의 실현인 셈이다.
물론 아직은 일부 선구자적 담론가들의 제안일 뿐이다. 또 블록체인 운영 메커니즘인 암호화폐의 위험성이나, 사이버 보안과 같은 문제도 충분히 예상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프로토콜 경제’를 착안하게 된 동기다. 장차 디지털 기술에 종속된 다수의 대중은 불안정한 ‘긱(gig) 시티즌’으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허약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세상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 모티브라고 하겠다. 뒤집어보면 이는 사회총합의 부를 어떻게 지혜롭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또한 더 처절한 이유도 있다. 살기 위해 벌이는 ‘죽음의 노동’, 그 종말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프로토콜 경제는 그래서 필사적인 ‘생존’의 해법이라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