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앨트먼 ‘창의성 모델’ 계기, ‘AGI 불가능’ 예측 새삼 주목
“AI는 인간에게서, 인간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프롬프트 받아”
“알려진 지식·정보 아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질문 불가”
‘AGI 불가론자’들 “‘AI의 창의성 블록’이 근본적 한계” 지적
[애플경제 김홍기 기자] 기술 만능주의자들일수록 조만간에 ‘초지능’, 곧 인간에 버금가는 창의적 능력을 갖춘 ‘AGI’(일반(범용) 인공지능)가 출현할 것처럼 얘기한다. 그 대표적 인물인 샘 앨트먼은 최근에도 ‘창의적 글쓰기’에 익숙한 AI를 개발했다며 ‘초지능’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적지않은 업계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특히 인간과 똑같은 수준의 창의력을 갖춘 AGI가 나올 경우는 ‘0’%란 극단적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엑시오스’의 디지털기술 전문기자인 스콧 로젠버그는 “‘기술 전도사’들은 언제든지 ‘초지능’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AI가 스스로 ‘다빈치’나 ‘아인슈타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라고 했다.
“AI 스스로 다빈치, 아인슈타인 될 순 없어”
실제로 로젠버그와 같은 생각으로 지금 기대하는 수준의 ‘AGI’가 출현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시각이 더 많다는 관측도 있다. 이에 반박이라도 하듯, 샘 앨트먼은 ‘X Tuesday’에 올린 게시물에서 “창의적 글쓰기에 능숙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다”고 자랑하며, 특히 “‘AI와 슬픔’이란 주제에 대한 1,000단어 분량의 ‘메타픽션’ 작품을 선보였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서사나 이야기를 전달하든, 아니면 새로운 기술 탐구와 같은 과학적 시도에서든, 오늘날의 생성AI는 (인간 수준의) 창의적인 도약과 새로운 통찰력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AI는 오로지 이미 “알고 있거나, 알려진 지식과 정보”, 즉 훈련된 데이터와 한정된 ‘생각하는 방식’에 국한되어있다. 그리곤 프롬프트에 가장 적합하거나, 만족시킬 만한 다음 단어나 픽셀을 추측하곤 한다.
이런 생각은 또 다른 많은 전문가들도 공유하고 있다. 허깅 페이스의 공동창립자인 토마스 울프는 최근 X에서 “AI 모델은 사람들을 그저 만족시키고, 즐겁고 편리하게 하며, 그 유용성을 증명할 뿐 더 이상 ‘경계’를 넓히지 않을 것”이라며 사실상 ‘AGI’의 출현 가능성을 일축했다.
최근 WSJ가 인용한 바에 의하면 울프는 “각종 개발과 연구에 투입되는 AI는 그저 ‘서버의 예스맨’”이라고 코멘트했다. 정확한 의미에서 ‘창의’가 아니라 이미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지식을 응용하는데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데이터 센터에서 정녕 ‘아인슈타인’을 만들려면, 모든 답을 아는 시스템이 필요할 뿐 아니라, 아무도 생각하거나 감히 질문하지 못했던 질문을 (최초로) 할 수 있는 (창의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미 인간 혹은 인류 문명에 의해 주입된 지식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를 적절히 변용하거나 응용한 것을 두고 ‘인간 수준의 창의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AI벤치마크 역시 “명확하게 규정된 답 요구”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AI의 발전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벤치마크다. 벤치마크는 흔히 매우 어려운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박사 학위 소지자가 작성하는 평가항목들이다. 그러나 모두 그 답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거나, 아예 단일한 폐쇄적 답변이 정해진 경우가 많다. 즉, 예측불가한 엉뚱한 발상의 답을 생각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진정한 과학적 돌파구는 ‘알려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적인 새로운 질문’을 하고 일반적인 개념과 기존 아이디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나온다”는 울프의 반박이다.
과연 지금의 데이터 기반의 학습과 추론, 생성에 주력하는 AI기술로 가능한 일이 아니란 지적이다.
더욱이 AI가 매력적인 창의적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 보인다. AI가 만든 대부분의 작품은 문자 그대로 ‘파생적’ 결과물이거나 응용의 산물들이다. 물론 인간들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처음 입문 단계나 초보 시절에는 모방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인간 예술 작품은 콜라주나, 재작성 또는 리믹스를 효과적으로 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억에 남거나 훌륭한 족적을 남긴 예술가들은 자신이 사사하거나 모방한 예술가들로부터 배운 것과 혼합, 재창조에 능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앨트먼이 게시한 AI의 소설 작품은 “형식적인 구성을 보여주었지만 ‘표현’이라기보단, ‘응답’에 가까운 수준”이란 혹평이 따랐다.
앞으로도 많은 예술가들은 AI를 귀중한 창작 도구나, 브레인스토밍 보조 도구 정도로 여길 뿐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AI를 사용하되,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이를 활용할 뿐이다.
창조는 인간에게도 힘든 작업이다. 머릿속의 모호한 아이디어를 대중이 접할 수 있는 단어나 그림, 이미지 등의 가시적 소재로 재창조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로젠버그는 “그런 점에서 흔히 인간을 AI에 의해 해방시켜 주겠다는 AI 숭배자들의 말은 그야말로 공허한 약속”이라고 비꼬았다. 즉 AI가 과연 사람처럼 치열한 ‘내면의 갈등과 마찰’이나, ‘불꽃’과 같은 창조 열기, 아픔 등을 감내한 창조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요 테크 기업은 물론 주류 언론에서도 AGI의 출현을 부정하는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뉴욕타임스’(NYT) 테크 컬럼니스트이자 기자인 케빈 로즈는 “각종 연구기관에서 AGI에 대비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의 대부분은 ‘결국 우리가 어차피 해야 할 일’로 귀결된다.”며 그 진화에 대비한 방법을 나열했다.
언론과 산업계 ‘AGI 기정사실 vs 불가능’ 맞서
즉 에너지 인프라를 현대화하고, 사이버 보안 방어를 강화하고, AI 설계 약물에 대한 승인 파이프라인을 가속화하고, 가장 심각한 AI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을 작성하고, 학교에서 AI 문해력을 가르치고, 곧 쓸모없어질 기술 기술보다 사회적 정서적 발달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AGI가 있든 없든 꼭 필요한 현명한 아이디어”란 얘기다.
로즈 기자는 그러면서 “A.G.I.가 제가 예상한 것보다 10년 늦게, 2026년이 아니라 2036년에 출시된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낙관론을 전제한 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나 NYT의 로즈 기자보단, 엑시오스의 로젠버그 기자의 논리가 좀더 정교한 것으로 보인다. 로젠버그는 “LLM은 많은 것(거대한 데이터셋)을 읽었지만,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과 같다”고 했다. 즉 “LLM은 팔에 햇살을 느끼거나, 머리에 빗방울을 맞은 적이 없고, 부모나 자식을 알고, 출산하거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다”면서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거나, 그것을 글이나 음악 또는 다른 형태로 형상화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극명하게 묘사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AI가 그것을 얻을 방법은 많지 않다.”고 짚었다.
물론 생성 AI와 로봇공학의 융합이 인간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좀더 발달한 구체화된 LLM은 인간이 ‘예술’이라고 인식할 만한 수준에 가깝게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AI는 결코 진정으로 창의적일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다.
허깅 페이스의 울프 대표는 “왜냐하면 AI는 그저 장난치며 놀거나, 동료나 최고의 경쟁자에게 호감이나 적대감 등을 주거나, 세상에 작은 흔적을 남기려는 동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AI는 사람들로부터 프롬프트를 받는 반면,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삶에서 프롬프트를 받는다”고 했다. 물론 그 언젠가는 AGI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무조건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AI의 창의성 블록’(AI's creative block)이 존재하는 한 AGI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