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스스로 소설까지 쓸 것이란 얘기가 나온지 꽤 되었다. 허나 아직도 기억할 만한 소설을 AI가 썼다는 소식은 없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은 일이 생겼다. 우리의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마치 벼락처럼 닥친 희소식에 일부 독자 대중의 행간에선 “미쳤다”는 외마디 소리까지 나왔다. 그날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우리네 평범한 일상은 그 엄청난 소식에 희열의 도가니로 변했다. 너나없이 ‘디지털敎’의 신도가 된 지금 세상에서 모처럼 인간의 언어가 위대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과 같은 호사가들이 ‘인간 수준 AI’를 떠든게 며칠 전이다. AI의 권위자라는 메타의 얀 르쿤도 “세상을 이해하는 AI가 먼저 필요하다”면서 거들었다. 그래서 나온게 소위 ‘월드모델’(Worle Model)이다. 인간만큼이나 인간과 세상을 알고 이해하는 AI란 뜻이다. 과연 AI가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새겨보면, 그 전제부터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애초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AI는 불가능하다. 그럴려면 모름지기 ‘인간이 되어’ 부대끼며 기쁨과 슬픔, 삶의 질곡과 보람, 질병과 죽음 따위를 같이 해야 한다.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세포로 된 신체와 정신으로 삶을 대면하고 해명하며 체화해야 한다. 그러나 AI는 아무리 뛰어난들, 삶을 대리 체험하고, 대행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실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영화 ‘AI’의 컴퓨터 속 연인 ‘사만다’ 수준이면 소설 흉내는 낼지 모른다. 그래봐야 기승전결을 갖춘 깔끔한 구성에다, 수없이 반복 생산되었던 인간 작가들의 콘텐츠를 재가공하며, 살을 꾸미는 수준일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실존을 새롭게 성찰한, 그 무엇을 토해낼 수는 없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한강’이야말로 그 증거다. 그런 ‘AI 만능론’은 논쟁 가치조차 없는 탐욕의 소치임을 ‘한강’의 미학적 서사가 일깨워준다. 돌이켜보면, ‘한강’의 세상에 대한 독해력은 가히 위대하다. <채식주의자>, <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은 대상과 자연의 외관을 해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그 외관의 ‘배후’를 다시 제2의 리얼리티로 변용하고, 젖은 언어로 독자와 화해한다. 존재론적 가치를 성찰하며, 미학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렇게 입증해보인 인간 최고의 콘텐츠 능력은 기계적 추론이나 데이터 학습에 비길게 아니다. ‘죽음의 상인’이었던 알프레드 노벨이 말년에 발견했듯이, 인간 존엄성과 연대에 대한 깨달음을 밑천삼은 것이다.

다시 톺아보면, 그 자구 하나마다 한국인의 곪아터진 콤플렉스를 치유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인의 현대사에 건네는 애잔한 ‘위로’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저항문학’은 아니다. 5.18, 4.3 등과 같은 역사적 요소나 부분을, 현대사의 외관과 동일시하는 ‘저항’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극도의 잔인함과, 한없는 사랑의 면모를 함께 내포한 ‘인간성’, 그것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에 먼저 부딪힌다.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차별을 거슬러 이 땅의 ‘나’와 ‘나 아닌 것’이 모두 살아있는 관계이길 소망한 것이다. 그렇기에 직설적 ‘저항문학’보다, 더욱 가슴저린 ‘저항의 언어’가 문학대중을 울리고 있다. 그런 텍스트적 긴장감과 역사성이야말로 ‘한강’의 압권이다. AI니, AGI니, 천하의 ‘월드모델’이니 하는 기계 언어들로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AI를 만드는 개발자나 과학자가 ‘한강’ 수준의 문학도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한강’은 허망한 테크노피아 신봉자들의 뺨을 후려친 셈이다.

인간은 유일무이한 ‘창발’의 소유자다. 그 어떤 프로그래밍이나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제2의 조물주’ 같은 존재다. ‘한강’은 인간만의 '창발력' 또한 증명해보였다. '창발'은 생물학적 분자나 화학적 재료의 결합에 의한 결과물을 뛰어넘는다. 그런 결합의 결과물과는 전혀 다른 실체를 창조한다.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를 재료삼되, 완전히 새로운 실존적 서사를 창발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 문학의 세계적 위상을 재확인시켰다’거나, ‘국격을 높였다’느니 하는 표현은 어색하다. 작가 한강은 그 어떤 지적 사치나 소유의 욕망도 없었다. 그저 자신만의 언어로 거침없이 삶과 세상을 직역했을 뿐이다. 기계적 언어론 흉내낼 수 없는 고매한 작가정신을 빛낸 것이다. 노벨상위원회의 헌사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 시적 산문’의 위인일 뿐이다. 그래서다. 작가 한강을 보더라도 ‘인간 수준의 AI’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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