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했지만, 4월 총선은 큰 탈없이 잘 끝난 편이다.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미국 대선 국면에 비해선 그나마 점잖은 편이라고 할까. 온갖 가짜정보(disinformation)와 무지막지한 선동, 심지어 분신자살 소동까지 일며 가상과 실상을 혼돈케하는 그 나라 선거판에 비해선 그렇다. 이번 국내 총선에선 VR과 AI기반의 비디오 기술을 악용한 음해나 기만, 중상모략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천만 다행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한켠으론 뭔가 찜찜하다. 어딘가 2% 부족한 듯도 하고, 꼭 있어야 할 정치․사회적 서사의 알맹이가 빠진 것 같아서다.
분명 딥페이크 같은 야비한 도구가 힘을 못쓴 건 잘 된 일이다. 허나 우리 현실에 대한 역동적 진실 게임이라고 할까. 현상과 모순을 다시 역설적으로 독해하고, 그 해석된 텍스트 갈피에서 숨은 진리를 채굴해내는 역동적 행위, 그런 용기와 노력은 많지 않았다.다시 말해 한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패러디(parody) 내지 풍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어도 이번 총선에선 그러했다. 일부 투표장의 이른바 ‘대파’ 소동이 있긴 했지만, 딱 그 지점까지다. 대상에 대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한껏 드러내고 해독하는 창조행위가 드물었다.
하긴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선 패러디 문화가 시들해졌다. 물론 현행 선거법처럼 비합리적인 법과 제도 탓도 있고, 기득 권력계층의 ‘권력질’ 영향도 있을 것이다. 패러디 문화의 쇠퇴는 자칫 공동체의 사유 능력에 재갈을 물리기 십상이다. 특히 삭막한 디지털기술과 조화를 이뤄야 할 현대 민주주의에겐 치명적이다. 민주사회는 기존 사유를 격파하며, 새로운 사유를 반복하는 겹사유가 너무나 소중하다. 그런 겹겹의 사유는 당연시된 아우라를 붕괴 내지 파괴하는데서 시작된다. 기왕의 아우라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내고, 아우라의 상실 내지 ‘탈아우라’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시되는 기억들을 전복하고, 새로운 경험을 찾는 것이다. 그런 패러디의 끝엔 사실이나 진실보다 귀한 ‘진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보다 한 사회를 튼실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딥페이크와 패러디는 상극이며, 제로섬의 대결 상대다. 애초 현상을 비틀고 왜곡하는 과정은 비슷하나, 그 목적은 정 반대다. 둘 다 자연이 지닌 의태 능력처럼, 유사한 것을 생산하는 능력이란 점은 같다. 그러나 딥페이크는 적대적인 대상을 그저 훼손하는데 골몰하는 기만행위일 뿐이다. ‘탈아우라’는 커녕, 불순한 가짜 원본을 생성하며, 또 다른 권위적 스키마를 숭배하기 위한 파괴적 욕망의 표현이다. 정작 음해 상대의 모순에 도전하기보단, 오히려 더 너절하게 가공해서 더 큰 모순으로 증폭시키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미메시스의 동물’이다.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을 해석하고 지혜롭게 독해하는 것, 곧 미메시스 능력은 인간 문명의 토양 노릇을 한다. 그렇다면 딥페이크는 거짓된 아우라를 생성하고, 참된 미메시스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문명의 쇠퇴를 부르는 자해행위다. 지혜의 쇠락이며, 문명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를 오염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패러디는 객관화된 대상과의 ‘화해’가 근본 목적이다. 그게 딥페이크와의 가장 큰 차이다. 그런 화해를 위해 모순과 권력을 강하게 조롱하며 비틀어서 비판하는 것이다. 지배적 권력과 지위가 지닌 허위의식과 부당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고발하는 것이다. 패러디의 저격 대상이 되면 당장은 아플 수도 있다. 허나 그 대상을 ‘존재’로 객관화하며, 살아있는 언어로 소통하는 행위, 곧 한나 아렌트의 ‘정치성’을 실천하는 작업이다. 모순과 경험을 다시 해부하고 복기하며 회고함으로써 ‘성찰’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드러낸 패러디는 그 과녁이 된 주체에겐 고통스럽지만, 몸에 좋은 보약이다. 그 결과 민주적 각성을 하고, 탈권위주의적 권위가 부활하게 되면 더욱 좋은 일이다.
가히 패러디는 새로운 언어의 생성이다. ‘사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게 아니라, ‘사실’ 너머의 동태적 진리를 애써 탐구하는 것이다 나아가선 답답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타개하는 해법이다. 반면에 딥페이크는 죽은 언어와 문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 둘이야말로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디지털시대의 빛과 그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