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린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얼추 비슷한 말로 가짜 이미지, 즉 ‘모상’(模像)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시대다. 진짜같은 가짜, 혹은 가짜같은 진짜를 만들어내는 21세기 소피스트들의 천국이라고 할까. 디지털더블과 게임엔진 기반의 버츄얼 휴먼이나, 딥페이크가 실시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나라 안팎의 선거 국면에서 돌출한 숱한 가짜 인간과 가상시․공간에 의한 장난질은 그나마 약과다. 언젠가는 개발자의 손아귀마저 벗어날 트랜스포머가 우리네 삶 자체를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게 할 판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대충 10개의 인물 사진을 놓고, 독자들에게 ‘진짜 인간’을 식별하라고 퀴즈를 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오답을 내놓았다. 여느 딥페이크나 메타휴먼 기술을 넘어선, 정교하기 짝이 없는 생성AI와 미드저니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컴퓨팅과 AI는 이처럼 진실재로부터 한끝 차이로, 전혀 다르면서도 같아보이는 가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물을 압도하는 기교에 사람들은 본래적 현실을 착각하곤 한다. 사물의 원형을 인식하고 견고한 현실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 곧 인류 태고적의 ‘테크네’ 본능마저 망각해가는 것이다.
인류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다. 이상향적 테크노피아인가, 아니면 음울한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다. 악의적 의도를 지닌 가짜 이미지와 그로 인한 환각은 후자쪽이다. 최근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나, 대통령 바이든의 가짜 영상이 그런 경우다. 이들 영상은 절묘한 선과 음영, 3D 스캐닝과 고품질의 텍스처, 쉐이딩으로 사람의 인식 조건을 속인다. 다시 말해 감각이 사람을 속이며, 고품질 ‘테크네’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나아가서 미학적 황폐함을 유발하면서, 디스토피아로 가는 ‘넓은 문’을 열어제칠 수도 있다. 그나마 언어나 회화와 같은 전통적 시뮬라크르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시뮬레이션에 의한 이미지, 사건들, 즉 시뮬라시옹만이 득세하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도 그런 혼돈스런 세상의 엔진이 되고 있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은 매순간 환영술로 가득한 숏폼들을 실어나르느라 분주하다. 접속의 자유는 있되, 진정한 외로움을 만끽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급기야 며칠 전엔 메타와 스냅, 틱톡, X, 디스코드 CEO들이 나란히 미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허나 이들이 대오각성하여, 다시 선의로 충만하길 바라는건 지나친 기대다. 이들 슈퍼리치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삶과 몽환의 관계를 거꾸로 전복하고도 남을 부류다. 현실이 오히려 시뮬라크르를 모방하는 세태를 조장하는 배후일 뿐이다. 21세기 테크놀로지 국면을 자칫 거대한 허상과 미망(迷妄)으로 가득한 디스토피아로 전이시킬 세력이기도 하다.
물론 테크노피아로 가는 길도 있다. 가짜는 가짜이되, 유동적인 현실세계나 사건들, 이미지들, 감성적 언표들의 맥락을 그것에 충실히 접목시키는 노력이다. 2년 전 신통한 기술로 등장했던 메타버스를 예로 들 수 있다. 불행히도 ‘메타 세상은 큰돈이 안된다’고 해서 금방 시들해졌지만, 최근 다시 그 본질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애초 이는 선한 목적의 오류와 거짓을 방패삼고 있다. 오류, 거짓이 선하고 유용하게 쓰이려면, ‘허구’와 ‘없는 것’들을 마냥 ‘없다’고만 치부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비(非)존재, 즉 허구든, 허상이든, 인간의 착한 의지와 욕망에 충실히 복무한다면,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다. 일단 ‘존재’하는 비존재야말로 진짜와 다름없는 가치를 지닌 가짜라는 뜻이다. 이 경우 원본을 변형시킴으로써 창작의 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원본을 빼닮기보단, 원본과의 차이를 통해 새로움을 창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선사되는 것이다. 곧 테크노피아의 경지를 만들어낼 여지가 충분한 셈이다.
기술적 남용만 아니라면 메타버스의 구성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과 정보를 캡처, 묘사하는 ‘라이프로깅’이 그렇다. 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가상세계인 미러월드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유사하거나, 다른 대안적 세계를 디지털 데이터로 구축하는 ‘가상세계’도 그렇고, 현실공간에 2D 또는 3D로 표현한 가상세계를 오버랩하는 증강현실(AR)도 그러하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비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없는 것들을 없다고만 하지 않고, 그 메타 우주를 창발해내는 기법의 하나다. 그야말로 착한 속임수라고 하겠다. 시뮬라크르 시대의 끝이 길몽인지, 흉몽인지도 그런 선택지에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