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AI’는 이제 소비 대중의 ‘즐겨찾기’ 검색어가 되었다. 그 원리를 제대로 알든 모르든, 컴맹 수준의 그 누구든 입만 뻥긋했다 하면 ‘생성AI’다. 2024년엔 더 그럴 것 같다. 그야말로 아는 척 하고픈 장삼이사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도구가 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새해 갑진년 길목 또한 요란하기 짝이 없다. ‘AI와 인간’에 대한 덕담도 악담도 아닌, 착잡 미묘한 기대가 난무하고, 온갖 거대 담론과 글과 말과 책자가 홍수를 이룬다. 그럴수록 선명하게 눈에 띄는게 있다. 장황하게 열린 서사의 틈새에 숨어있는 시니피앙, 곧 AI가 내비치는 ‘기표’ 3가지다. 까보면 그 속엔 더욱 요란하고 변화무쌍한 ‘기의’가 도사리고 있다.
우선 생성AI를 구심점으로 ‘사람과 컴퓨터’의 소통방식이 크게 바뀐다는 사실이다. 정보와 지식을 찾아내기 위해 굳이 폴더 계단(디렉토리)을 오르내릴 필요가 없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만 하면, ‘입속의 혀’처럼 원하는 것을 AI가 바로 꺼내놓는다. 컴퓨팅 역사 이래 초유의 OS 혹은 유저 인터페이스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성AI 자체가 충실한 유저 인터페이스로 직분을 바꾸며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엔 사람과 지식의 함수가 갖는 ‘비선형’(非線型)의 함의가 스며있다. 애초 인간을 둘러싼 온갖 빅데이터는 딱 잘라 얘기하기엔 너무나 유기적이다. 그 어떤 자연의 종속변수보다 복잡한 경우의 수가 작동한다. 그걸 인공지능의 진화로 정연하게, 그리고 가장 첨단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피드백이 생성형 프롬프트다. 강화학습의 원조격인 ‘알파고’가 1초에 400만번의 바둑 대국을 두었다고 하던가. 그러나 그조차 흉내내기 힘들 만큼 강화된게 생성AI다. 아이디어, 코드, 지식, 정보, 이미지, 사유, 사회적 관계 등 원하는 것 모두를 무한대로 뿜어내는 화수분이 생성AI다.
두 번째 기표는 걱정되는 대목이다. 내년 이후엔 사회공학적 계급이 더욱 분화될 것이다. 생성AI로 이미 개발자들은 실직 위기에 떨고 있다. 영업, 마케팅, HR의 인간적 퍼포먼스조차 AI가 넘보고 있다. 구글 등 빅테크들도 내년에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할 태세다. 국내 산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나아가선 일자리를 넘어선 사회구조적 문제도 도사리고 있다. ‘디지털 소외’가 그것이다. 접속 시장에서 ‘체험’을 누가 더 많이 갖고, 지배할 것인가가 하는 것이다. 무릇 정보를 생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경제적 자원이자, 승자를 가리는 부가가치다. 그에 대한 접근성은 곧 부의 결정적 요소다. 다니엘 벨의 말처럼 “정보와 통신에 대한 (원만한) 접속은 자유의 조건”이며, 체험으로부터의 배제는 비접속에 의한 부자유함이다. 기술문명의 극한치라고 할 싱귤래리티(특이점)로 치달을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컴퓨팅과 프롬프트 능력은 기왕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전복하는 혁명이다. 심지어는 탈근대의 열매를 극대화할 만한 메타포로 과장될 수도 있다. 거꾸로 정보와 지식 채굴 방식에 서툴거나, 컴퓨팅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대중은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그와 달리 노마드적 변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애그리게이터 등과는 단절되고 양분될 수 밖에 없다. 생성AI 이후 디지털 사회는 그토록 자유로운 자와, 비접속의 부자유한 자 간의 이질감과 갈등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와는 또 다른 전망도 있다. AI가 말 그대로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오픈AI가 제시한 GPTs나 AI에이전트 따위가 그런 통로 역할을 한다. 누구나 GPT앱이나 플러그인으로 자신만의 AI 결과물을 창조할 수 있고, GPT스토어에 내다팔 수도 있고, 그게 생업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인의 모든 시간이 오로지 AI 내지 AI앱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적 모반’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들은 그저 데이터 제공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디지털 엘리트의 독점을 견제하고 참여하는 프로세서(processor)가 되기도 한다. 그 중 상당수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전문지식과 자원을 총괄하고 동원한다. 흡사 1990년대 미국 시민사회 일각에서 등장했던 ‘대중역학’을 방불케 한다. 과학기술의 엘리트화가 아닌 대중적 공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좋게 말해 대중을 위한 기술민주주의의 길조라고 할까. 앞서 ‘디지털 소외’와는 사뭇 다른, 우리 시대의 부조화스런 자화상이다. 2024년은 그처럼 서로 알쏭달쏭 모순된, 기표와 기의의 연속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