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라면, AI는 21세기 과학 문명의 ‘유전자’나 다름없다. 샘 앨트먼의 전격 해고, 전격 복직으로 끝난 ‘오픈AI사태’의 맥락도 그로부터 설명이 된다. 앨트먼과 함께 오픈AI를 공동창업했음에도 그를 내쫓는데 앞장섰던 일리야 서츠케버 진영의 ‘5일 천하’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AI를 인간이 어떻게 섭취하고 복제하고 진화시켜야 하는가. 그에 대한 이견과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AI에 올라탄 지금 세상에서 그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있을까. 그래서 ‘오픈AI 사태’는 결코 한 글로벌 스타트업의 ‘사태’만은 아니다. AI문명의 불편한 진실을 둔 샅바싸움 내지 추궁이라고 하겠다.
앨트먼과 그 동조자들은 AI의 급속한 발전을 희구한다. AI 모델링의 광범위한 공개와 배치가 스트레스 테스트와 기술 완성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상용화 자체가 기술적 임상시험을 겸한다고나 할까. 챗GPT 처음 나올 때처럼 일단 오류를 무릅쓰고, 세상사람들이 신기술의 ‘간’을 먼저 보게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에 맞선 이들은 모든 언어모델의 구축 결과가 인간이 소화해낼 만큼 안전한지 확인하는게 우선이란 주장이다. 세상에 내놓기까지 실험실에서 AI를 철저히 검증하고 오류의 원천을 없애는게 기본이라고 믿는다. 특히 셔츠케버 등은 ‘효과적인 이타주의’라는, 다소 교조적인 공공선 철학을 배수진으로 깔고 있다. 그러면서 앨트먼의 발목을 잡곤 했다.
앨트먼 등은 ‘이타주의’자들 방식대로라면, 어느 세월에 기술이 빛을 보겠느냐는 불만이다. 물론 그도 “잘못 사용하면 AI는 인간에게 위험하긴 하다”고 주석을 달곤 했지만, 어디까지나 ‘속도론’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 와중에 장차 AGI(인간 수준 초지능 AI)를 염두에 둔 GAI(Generative AI)를 앨트먼이 공개하면서 갈등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셔츠케버 등이 크게 반발했고, 양자는 멱살잡기 직전에 이를 만큼 충돌했다.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이사회를 무기로 앨트먼을 내쫓았다가, 5일만에 백기를 든 것이다.
아직은 누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건 섣부르다. 둘다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환원적 사고라는 점에선 같다. 인간과 기계의 매트릭스라는 킬러 문항에 대한 정답 찾기란 점에서도 입장은 같다. 따지고 보면 애초 모든 진화의 객체가 그러했듯이, AI를 포함한 기술문명도 ‘돌연변이’의 산물이다. 침울한 현상유지나 정상 상태, 현존의 껍질을 깬 새로운 밈(meme, 복제)의 탄생이다. 더욱이 다위니즘의 ‘자연선택’론은 지금 디지털 기술문명에선 잘 먹히지가 않는다. 21세기의 욕망을 전통적인 진화와 유전자 원리라는 좁은 문맥에 가두기엔 그 볼륨이 너무가 크다. 하루, 아니 매 실시간으로 나의 것이 남의 것으로 ‘모방’되며, 모든 새것이 삽시간에 헌 것이 된다. 그렇게 무한 변천하는 기술 파라미터를 ‘이건 이렇다’고 규정하다간, 무지한 결정론자 취급받기 십상이다.
‘오픈AI 사태’는 그런 난해한 Q&A를 지금 지구촌에 던진 ‘대사건’이다. 앨트먼과 셔츠케버 의 다툼 자체는 그래서 일순의 입장차를 넘어선 본질적 의문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다. 다른 아닌 ‘인간 소외’에 대한 불안이다. 디지털혁명의 성취에 의문을 갖게 하는 가장 큰 딜레마이기도 하다. 또한 산업시대로부터 내려온 ‘노동’이라는, 신성한 계명을 언제까지 준수해야 하느냐는 물음도 스며있다. 나아가선 기계가 인간이성을 대체하는 ‘제2의 인류세’가 등장할 것인가. 그런 의구심과 불안도 감출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앨트먼과 셔츠케버 모두 표현방식은 달랐지만, 각자의 맥락은 같다. AI의 현재와 미래를 두고,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이냐, 아니면 사회․문화적 돌연변이로 봐야 하나? 그런 ‘AI의 길’을 둔, 한 테이블 위의 난상토론일 뿐이다. 어쩌면 양 진영은 ‘동병상련’의 세상 걱정을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지 애널리스트 누군가 그랬다. “‘오픈AI 사태’는 AI의 미래를 재설정하기 위한 매우 짧고 극적인 사건”이라고-. 또 다른 이들은 “오픈AI도 덕분에 더 가치있는 조직으로 성장했다”고 치켜세웠다. 모두 맞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