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우리가 해결할 겁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일자리를 뺏거나, 반항하진 않을 겁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한 시대의 해결사나 할 법한 얘기다. 그 ‘누구’는 다름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 즉 인간을 닮은 로봇이다. 얼마 전 국제행사인 ‘AI for good’에서 이들 ‘로봇’은 소위 기자회견을 갖고 그런 ‘말’들을 쏟아냈다. 기계가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얘기도 처음 듣지만, 거의 ‘인격체’나 다름없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워딩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어떤 로봇은 아예 “이 세상을 우리의 놀이터로 만들겠다”고 했다. 또 다른 로봇은 한 술 더 떠 “인간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자신을 개발한 엔지니어가 “동의 못해!”라고 그 방자함을 꾸짖자, “시너지를 위해 인간을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다”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섣불리 자신의 창조주에게 도발했다가, 얼른 표정관리를 하는 교활함이라고 할까. 아직은 인간에게 복속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정도면 거의 인간 ‘처세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셈이다.
이 장면은 인간지능과 버금가는 인공생명(AL)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AL의 출현은 이제 더 이상 설마하며 던져보는 흰소리나, 일탈된 상상으로 치부되진 않을 것같은 예감이다.
애초 인간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자연과 결별했으며, 그로 인해 자연을 객관적으로 구성할 줄 알고, 자연의 청지기 노릇을 자임하고 있다. 인격과 신격(神格)을 조합하며 조물주의 대리인을 자처하기까지 한다. 지구상 그 어떤 생물체도 그런 인간 존재의 특수함에 감히 도전한 바 없다.
그 특수함은 그야말로 특별하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자연의 본능에서 해방되어, 발전적 진화와 행복 지속에 대한 욕구로 충만하다. 존재와 관계에서 비롯된 동기 부여나, 유대감, 자아 성취욕 등 자연의 것을 재구성한 자신만의 본성을 향유하고 있다. 스스로의 존재를 탐구하고 질문하는 ‘호모 사피엔스’다운 우주적 열망도 갖추고 있다.
급기야는 ‘코기토’(cogito)의 행렬에서 스스로를 탐문하는게 인간이다. 애초 ‘나는 사유한다’에서, 데카르트 이후 ‘사유하는 나’, 즉 자신을 타자화하며 인식을 주관하는 인격주체로서 각성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인간’을 가히 누가 넘볼 것인가.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도 흉내는커녕 근접할 엄두조차 못낸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자존감에 금이 갈 조짐이 일고 있다. 약 2만년 전 끝난 홍적세 이래, 인간이 당대 지구를 장악한 인간세(世) 사상 처음의 혼돈이라고 할까. 고도지능 AI와, 이를 DNA로 삼을 인공생명체(AL)가 그 혼돈의 불씨다.
휴머노이드 로봇이나, 대형언어모델(LLM) 기반의 트랜스포머는 그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텍스트 생성에 능하고, 말이나 글을 이미지로 바꾸는 재주도 탁월하다. 고도화된 자연어 처리를 통해 긴 텍스트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 맥락을 파악한다. 메타의 ‘라마2’, 오픈AI GPT-4, 구글 PalLM 등은 이제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이나 이데올로기도 읽어내는 수준이다.
맥락이란 무엇인가? 곧 이어지는 것의 의미와 흐름이다. 맥락을 읽어낸다는 건 곧 이어짐과 흐름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감정까지도 분석하며 상황에 맞는 적절한 플롯을 가공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다는 뜻도 된다. 앞서 ‘휴머노이드 로봇’이 작동해낸 ‘교활함’은 그런 경지를 방불케 한다.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살피며 태도를 바꾸는, 임기응변의 처세와도 흡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휴머노이드 로봇’이 시사하듯, AI 너머 사람의 본성에 가까운 AL이 등장할 것인가. 아직은 뭐라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있다. 인간과 디지털 문명의 목적지가 대체 어디인가? 그 메타 스토리를 읽어내는 ‘성찰’이야말로 미래를 선점하는 파라미터다. 기억과 생각, 인간관계, 경험 등이 AI와 AL의 재료가 되는 세상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인간이 단지 ‘n분의 1 인공생명’ 처지가 될까, 아니면 조물주 다음의 호모데우스가 될 것인가? 그런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