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이 생성의 주체로 행세하게 된 건 순전히 언어 덕분이다. 오늘날 디지털 문명을 해독하고, 생성하는 것 역시 자연언어에 기반한 인공언어, 곧 기계언어다. 티오비(TIOBE) 프로그래밍 언어 순위 집계를 늘 유심히 지켜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파이썬(Python)과 C, C++, 자바, 자바스크립트의 순위 다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IT기술과 디지털세계의 존재방식에 다름 아니다.

‘티오비’는 검색엔진에서 많이 언급될수록 해당 언어의 순위를 높게 매긴다. 여기서 ‘검색’이란 또 다른 ‘존재의 창’이라고 하겠다. 수많은 개발자와 프로그래머, 학생, 일반인을 망라한 디지털시민들이 희구하는 기술 생태계와 문법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어떤 언어가 어떻게 많이 쓰이는지, 연봉이나 직업적 부가가치는 어떠한지를 가늠하게 하고, 때론 어떤 언어를 배워야 할까 고민하는 입문자들의 매뉴얼북 역할도 한다. 지구상에서 무려 600개나 된다는 프로그램 언어마다 이처럼 다양한 평가와 분석이 따른다. 그 중엔 ‘코끼리’ 품평 수준도 있으나, 고도의 전문적 식견이 뒷받침된 사용설명서도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요즘 부동의 베스트셀러인 파이썬은 역시 단점보다 장점이 많이 꼽힌다. 우선 초보자들에게도 쉽다. 진도가 나갈수록 크게 어려워지는 다른 언어에 비해, 난이도가 평이하다. 간단하면서 편리한 구조에다, 쉽게 설치할 수 있고 접속할 만한 라이브러리도 많다. 고난도의 프로그래밍을 제외하곤, 웬만한 작업은 파이썬으로 쉽게 할 수 있다보니, 장삼이사의 디지털도구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론 버그나 오류, 그리고 보안상의 취약점과 같은 단점이 거론되긴 해도, 여전히 최고의 대중적 기계언어로 몸값을 올리고 있다.

C와 C#, C++, 자바도 만만찮다. 만만치 않다기보단, 이들 역시 변함없는 아우라로 여전히 IT세계에 군림하고 있는 명품 언어들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듯, C#는 오랜 세월 익숙했던 자바로 쉽게 이전할 수 있어 좋고, 다른 언어의 개념을 대부분 섭렵하면서도 고품질의 GUI 기반 응용프로그램을 쉽게 만들 수 있다. 경험자에 따라선 “다른 언어들에 비해 자연어에 가까운 문법을 가지고 있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C나 C++도 프로그램 개발언어의 ‘대부’다운 위상과 품격을 잃지않고 있다. C는 규모가 작고, 내장형으로 보안이 중요한 고성능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C++는 C의 기능을 뛰어넘어 대규모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작성하는 데 안성맞춤이며, 업계 최고 수준의 전문 개발자들 사이에선 가장 손꼽히는 존재다. 심지어 파이썬이나, 최근 뜨고 있는 PHP, 오브젝트-C 등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는 평가도 따른다.

하지만 자연언어가 그렇듯, 이들 기계언어들의 우열을 가리는 건 그다지 중요치않다. ‘티오비’ 순위는 일종의 인기투표 정도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 용도와 조건변수, 목전의 상황 등에 따라 각자가 지닌 가치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어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의 ‘품질’을 두고 서열을 매긴다면 어떨까. 그랬다간, ‘문화 상대주의’를 외면하는 몰상식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생전에 이를 주창했던 프란츠 보아스가 지하에서 격노할 수도 있다. 프로그램 언어 역시 같은 이치다. 최근 ‘티오비’ 상위권에 진입한 비주얼 베이직이나, 자바스크립트, SQL, 어셈블리 언어, PHP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처음으로 ‘톱20’에 랭크된 스크래치나 러스트(Rust)도 그 동안 순위나 점유율은 어찌됐든, 그 나름의 ‘존재의 집’으로 역할을 해온 것들이다.

이점을 염두에 둔 듯, ‘티오비’도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는 고유의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또한 “언어마다 특정 영역에서 우수한 점을 갖고 있으며, 순위는 검색엔진에 얼마나 언급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결과일뿐”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참고만 하라는 뜻이다. 점유율 변화를 참고하여 언어의 미래 조감도를 그려보라는 의미도 된다. 결코 “유망한 언어”를 고르는게 아니다. 그저 전문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설계가 얼마나 최신인지 확인할 수도 있고, 새로운 SW에 어떤 언어를 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활용하란 얘기다.

다만 변치 않는 건 이들 언어는 IT문명의 집이라는 사실이다. 곧 디지털 문명의 향배가 걸린 도구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낱말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디지털 세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티오비가 집계하는 언어의 순위 다툼을 계속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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