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이익 공유, 중국 내 생산확대 금지, 보조금 빌미, '영업기밀 침해' 우려
삼성·SK하이닉스 등 韓기업 난감, 국내 반도체 기업 'K-칩스법' 국회 표류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애플경제 안정현 기자]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칩스법')에 따른 보조금 신청절차 및 심사기준을 발표한 가운데 국내 기업에 독소조항이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받는 지원금보다 충족해야 할 기준이 훨씬 까다로워 차라리 받지 않는게 낫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미·중 무역전쟁 속 정치적 관계까지 얽혀있는 만큼 한국 정부·기업이 어떻게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지가 주목된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대기업의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최대 25%까지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3월에도 국회 장벽을 넘지 못할 것으로 관측돼 국내 반도체 기업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글로벌 흐름 속 한국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초과이익 공유하고, 중국 투자 제한···"보조금이 아니라 족쇄"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칩스법에 따른 39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 지급 기준을 공개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기업에 한화 50조원의 보조금이 지원된다.

그러나 보조금을 그리 쉽게 받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보조금이 국내 기업에게 족쇄가 될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 상무부는 지원 신청 기업들을 대상으로 ▲경제·국가 안보 ▲상업적 타당성 ▲재무상태 ▲투자이행 역량 ▲인력개발 ▲그 외 미래투자 약속, 미국산 철강활용 여부, 자사주 매입제한 등을 검토할 예정이다.

문제는 1억 5000만달러 이상 지원받는 기업은 이익이 전망치를 초과할 때 미국 정부와 초과분 일부를 공유해야 하는 조항이다. 또 칩스법이 미국의 경제·안보를 최우선시 하는 만큼 자국에 군사용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을 권장했다.

뿐만 아니라 상무부는 기업이 중국 등 우려국과 공동 연구 또는 기술 라이선스를 진행할 경우 지원금 전액을 회수할 것이며, 10년 동안 우려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사실상 중국으로의 투자를 저해하겠다는 의도다. 한국 반도체 양대산맥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들의 반도체 매출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를 웃돈다. 생산량으로 따지면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 중 절반 가량을 중국에서 만든다.

지원보다는 제재 성격이 짙은 이번 미국의 정책에 국내 반도체 기업은 점진적 탈중국 시나리오까지 검토해야 하는 '진퇴양난' 처지에 놓였다.

보조금을 빌미로 기업 주도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이 "기업들에게 회계장부를 요구할 것이며 어떤 기업에게도 백지수표는 없다"고 경고한 만큼, 신청 기업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심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기업이 오랜 기간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지 등 효율성을 심사하겠다는 의도인데, 이는 사실상 영업비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정우택 국회 부의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보조금 지원정책이 아니라 족쇄 수준 규제나 다름 없어 보인다"며 "그러잖아도 힘든 한국 최대 수출 품목 반도체 산업에 보조금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초과이익을 공유하라는 것은 법인세 외에 준조세까지 내는 이중과세에 해당하고, 기업의 회계장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것도 지나친 경영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무리한 요구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해 한·미가 서로 윈윈(win-win)하는 해법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정 부의장이 제시한 해법이다.

정부는 치열한 물밑 협상을 통해 미국의 난감한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가드레일 세부규정 마련 과정에서 우리 기업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미국 관계당국과 계속 협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중국 등 우려국과의 교역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가드레일 조항에 대한 세부 규정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발표될 예정이다.

K-칩스법, 논란 속 국회서 표류·

이처럼 반도체 산업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대처가 더욱 적극적이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칩스법에서 우리 기업에게 불리한 조건을 최대한 제거하는 동시에, 아직도 깜깜무소식인 반도체 세제지원 혜택안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 등 주요국은 반도체 투자·연구개발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해오고있는 반면,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K-칩스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정안은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8%에서 15%까지 높이는 내용을 담았다.

반도체 대기업의 세액공제율을 6%에서 8%로 올리는 조세특례제한법은 이미 작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윤석열 대통령이 세제 지원 확대를 요청하자 기획재정부는 대기업의 세액공제율을 8%에서 15%로 높이는 2차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정책이 바뀌는 것은 무리이며 대규모 감세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기업의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재벌 특혜' 정책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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