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경제 안정현 기자] 어딘가에서 본 우스운 이야기다. "적정 음주량을 넘겨 술을 마셔라. 그리고 그 상태로 혼자 영화관에 가라. 알코올로 침침해진 눈과 잘 들리지 않는 귀로 2시간짜리 영화를 견뎌봐라. 영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노인이 하루종일 느끼는 감각과 유사하다."

젊은이 보다 '더' 젊게 사는 정정한 노인들이 많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이런 상상은 모든 노인이 신체적으로 약할 것이며, 그렇기에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깔려있기도 하다. 고령층이 노화에 의해 심신 기능이 전성기때보다 떨어진다는 점을 잘 보여준 예시라 할 수 있다.

온갖 서비스에 '디지털' 3글자가 붙는 이 시대에 노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은 고립되고 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에 이들 취약계층의 속도는 터무니없이 느리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제각기 다른 속도를 균형있게 맞추는 방안은 고려되지 않는 것일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 오래인데도 주요 은행은 아직까지 영업시간을 늘리지 않고 있다. 당초 코로나가 정점이던 시기, 은행은 앞뒤로 30분씩 총 1시간 영업시간을 단축했다. 그러나 마스크 해제를 앞두고 있는 지금도 노사 합의가 끝나지 않았다며 정상화를 미적대고 있다. 이와 함께 비대면 거래가 증가함에 따라 오프라인 점포도 차츰 줄여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바일 뱅킹 서비스에 익숙치 않은 노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처사다. PC와 스마트폰을 다루기 힘든 집단은 혼자서 끙끙 헤매다 결국 대면 창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 점포에 방문하게 된다. 기자 또한 젊은 나이에 각종 비대면 서비스를 꽤 이용해 온 소비자임에도, 복잡한 절차에 못이겨 결국 직접 은행에 방문한 적이 많다. 젊은 사람조차도 어려운 모바일 업무를 디지털 취약계층이 간단하게 해낼 수 있을까.

은행 말고도 음식점을 비롯한 상점은 물론, 필수 행정 업무도 디지털로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패스트푸드나 식당은 키오스크 기기를 점차 늘려가며 아예 대면 주문을 받지 않는 가게도 있다. 카카오택시 등을 이용해 쉽게 택시를 잡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용 방법을 몰라 길을 헤매는 사람도 있다. 치열한 티켓팅이 모두 모바일에서 이뤄지는 바람에 취약계층은 기차, 콘서트 등 서비스를 누릴 기회를 자주 놓치기도 한다.

스마트폰 하나로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지만, 이는 디지털 정보를 숙지할 수 있는 계층에 한정된 모습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지적이 아니다. 디지털 소외 현상은 코로나 유행 이후 방역 목적을 위해 비대면 서비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겼을 때부터 제기됐다. 편리와 위생을 지킬 수 있는 서비스가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신조어 '누칼협'과 '알빠노'가 있다. '누칼협'은 '누가 칼들고 ~~하라고 협박했냐'는 뜻으로, 불행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를 개인 탓으로 돌리며 냉소하는 말이다. '알빠노'는 '내 알 바 아니다'를 줄여쓴 말로, '누칼협'과 비슷하게 남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냉담한 조소다. 이 두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은 존중과 공감을 '오지랖'으로 멸시하는 풍조와, 구성원의 고통과 선명한 분리선을 긋겠다는 의지가 사회에 만연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디지털 취약계층과 연관시켜 보면 지금 상황은 마치 온 세상이 디지털 취약계층을 상대로 '누칼협'과 '알빠노'의 자세를 보이는 듯하다. 노인과 장애인을 포함해 각자 사정으로 디지털 정보에 익숙해지기 어려운 계층이 겪는 애로사항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노인 디지털 교육과 같이 국가가 나서 디지털 취약계층을 돕는 움직임도 보이지만 소외 문제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그렇게 문제를 뭉뚱그리기엔 부족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 몸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임시 상태’라는 사실이다. 삶은 신(神)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관장되는 전쟁과 같은데, 내가 오늘 멀쩡하다고 해서 내일도 건강하리란 보장이 없다. 하루아침에 사고로 다리를 잃을 수도 있는 등 심신 건강이 항상 적절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디지털 취약계층이라고, 다소 급진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Z세대' 조차도 훗날 새롭게 등장할 기술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늙을 것이고 그 먼 미래를 뒤흔들 디지털 기술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장 50년 전에 키오스크가 있을 지 누가 알았겠는가. 젊은 세대가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노화를 거치고 사회 활동이 줄어들면 디지털 소외에 직면할 위험이 크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이기에 노인 따로, 젊은 사람 따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디지털 취약계층의 어려움에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기술을 일상에 스며들게 해 우리 삶의 편리성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우리'의 범주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걸 넘어 '디지털 혁신'이라는 꽤 그럴듯한 네이밍에만 매달리는 것은 기술이 흔히 두는 패착이다.

여기서 포용과 관용이라는 피상적인 결론으로 마무리짓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모두를 위한 기술을 부르짖은 지는 이미 오래다. 노인을 상대로 한 디지털 교육, 대면 서비스 유지 등 국가 및 기업에서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취약계층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 또 개별 시민들이 공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디지털 소외에 처한 약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작은 마음이 모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아울러 기술 발전을 모조리 막아버리고 모든 서비스를 대면으로 돌려놓으라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시대가 한창인 지금 이같은 말은 공허할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일궈낸 과학 기술이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려면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틈으로 소외되는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기술이 필요하다.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3'에서 장애인과 약자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 디지털 기기가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대표적으로 '닷'이 제안한 '닷 패드'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촉각 그래픽 장치로 '최고 혁신상'을 수상했다. 모바일 그림 등을 수천 개의 촉각 그래픽으로 표시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디지털 시각 자료를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각자의 핸디캡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기술이 적용된 혁신 기기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나오길 바란다. 한편으로 모두가 편리하다고 입을 모으는 기술이 혹시 또다른 누군가의 소외와 불편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충분한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기술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기술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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