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이제 칼럼이나 소논문을 써내는 정도가 아니다. 인공지능에게 아예 법인격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실현 가능한 가설들도 잇따르고 있다. 그렇게 되면 AI 스스로 판단해서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제도적 의무를 수행한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민법 제3조에는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좀 과장하면 인간 현존재에 버금가는 법리적 지위를 인공지능에 부여한다고 할까
물론 그런 인식은 과장되고 비약된 것이다. 아직은 기계가 인간의 대체제냐 보완재냐 하는 논쟁은 있어도, ‘감히’ 인간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애초 똑똑한 기계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에게 법인격이 부여된다고 해서, ‘인격’까지 허용되진 않는다. 기계는 물론, 그 어떤 피조물도 넘볼 수 없는게 인간의 경지다. 그렇잖아도 목적 아닌 수단이길 거부하고, 스마트 기계 문명에 의해 타자화될 것을 걱정하는게 인간이며, 인간성이다. 인간과 존재 간의 실존적 불일치에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큰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다시 발견하려는 조바심이기도 하다.
다만 인공지능에게 법인격까지 부여하며, 디지털 문명의 지능을 높이는걸 마다할 것까진 없다. 재화와 재물이 주체가 된 재단법인처럼 AI에 권리능력이 부여된 인공지능 법인도 충분히 설 자리가 있을 법하다. 좀더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우리 사회에 지능화와 자동화를 이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딱 그 지점까지다. 그 이상의 ‘인격’을 넘보는 건 있을 수 없다. 불가능할 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발전적 진화와 행복 지속에 대한 주체적 욕구, 존재를 바탕으로 한 유대감과 자아 성취욕은, 사유하는 인간만의 인격이며 본성이다. 호모사피엔스만의 우주적 특권이다.
설사 고도의 4단계 AI와 딥러닝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인간의 뇌와 뉴런신경망을 모방하고, 비지도학습으로 흉내낸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모방이며, 학습일 뿐이다. 심지어 초고속 병렬 연산의 양자컴퓨팅이나 양자알고리즘도 사람의 두뇌가 발굴한 기계원리에 불과하다. 인간의 두뇌를 흉내낼지언정, 그 신비한 인간정신의 오묘함까지 흉내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 오묘한 인간정신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유서깊은 인륜적 관습과 상호주관성을 토대로, 인간 존재의 총체적 맥락을 이어온 인류적 서사가 그것이다. 기계와 기술문명은 그런 서사를 풍요롭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곧 등장할지도 모를 인공지능 법인도 그런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단지 인공지능 법인을 앞세우면, 탈(脫)노동(postwork)’의 실존적 삶을 획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반드시 유급노동만을 생존 수단으로 신성시하는 직업윤리 대신, 기계와 알고리즘이 대신 일하는 인공지능 법인을 통해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꿀 수도 있다. ‘해방’까지는 몰라도, 기계가 만들어낸 부가가치 총량을 인간들이 고루 향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국내 한 경제학자가 “인공지능이 생산한 부를 n분의 1로 나누자”고 나름의 배분적 정의를 제시한 것도 그런 시각이다.
그런 세상에선 기술적 실업을 애써 극복하기에 앞서, 기계에 의한 완전실업을 미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뺏기는게 아니라, 그것을 일꾼으로 부리며 ‘노동을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적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들이 임금관계에 애먼글먼 하지않고, 노동의 주체가 되며,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놀기만 하려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IoT와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인으로 부리고자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일 뿐이다. 그렇게 단말마적 생존을 위한 노동이 줄어든다면 사람들은 어떨까. 한층 다양하게 각각의 잠재력을 증가시킬 자족적이며 실존적인 활동에 매진할 것이다. ‘인공지능 법인’이 그런 증강 현실을 예약할 수도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