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그럴리야 있겠나 싶으면서도 FTX 사태의 전말을 보고 있노라면, 암호화폐 시장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야말로 시장의 근본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게 지금이다. FTX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유동성 고갈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좀더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탈(脫)중앙과 분산의 미덕을 배반한 새파란 젊은이, 샘 뱅크맨 프리드의 탐욕이 빚은 파국이라고 해야 옳다. 그것도 이미 시작부터 운명지워진 파국이었다.

실속없는 허세와 내부자 거래, 돌려막기가 그의 주특기였다. ‘짜고치는 고스톱’ 마냥 자매기업 알라메다와 투자자들의 자금을 핑퐁하며, 자체 FTT코인 가격을 조작하고 통정매매를 일삼았다. 그 사이에 유동성이 뒷받침되지 않은채 FTT 가격은 ‘뻥튀기’로 일관했고, 멋모르고 맡긴 투자자들의 돈으로 뱅크맨 프리드는 다시 ‘헛돈질’을 하곤 했다. 코인 대출업체 블록파이의 어려운 사정을 돕는답시고, 거액을 들여 인수 옵션을 거는가 하면, 자금이 딸리는 암호화폐 업체들에게 선심을 쓰기도 했다. 워싱턴 정가에도 돈을 뿌려대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사회적 중력을 확보하려 애쓰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젠틀한 악동’의 모습이라고 할까. 결국은 눈치빠른 바이낸스 자오창펑의 “FTT는 믿을게 못된다”는 트윗 한 줄이 도화선이 되었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대표의 그 한 마디에 FTT는 속이 텅빈 유령자산임이 금세 드러났고, 끝없는 추락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지렛대삼아 서로 얽힌 사슬 구조의 거래소 생태계가 삽시간에 혼돈에 빠졌다. 한때 가상자산 세계의 ‘구세주’로까지 불렸던 젊은 사업가 샘 뱅크맨 프리드는 알고 보니 허황된 사상누각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분산의 가치나, 블록체인 작동 원리의 존재 이유 자체가 불신받기에 이르렀다. 이게 오늘의 사태의 전말이다.

암호화폐의 태생을 돌이켜보면, 충격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애초 암호화폐의 키워드는 ‘해체’가 아니던가. 근대 국민국가 이래 중앙 권력이 강제한 단일한 교환수단으로서 화폐가 등장했다. 암호화폐는 그런 중앙집권의 권위적 스키마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의미있는 대안으로 지목되었다. 블록과 블록의 사슬구조, 즉 휴먼 클라우드에 기초한 것으로, 탈중앙 블록 증명의 대가로 주어진 암호화폐가 거래되면서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혹자는 태초 이래 자발적이고 탈권력적인 물물교환으로 일관했던 인류의 태생적 본능에 더 가깝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분산기장을 통해 서로 인증되고 약속된다는 점에서 ‘가상’이 아닌, 치열하고 전투적인 현실의 경제표지로까지 승격되었다. 지금도 ‘가상화폐’라는 통칭으로 호명되길 거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암호화폐 초기에 당국은 “거래소를 폐지할 수도 있다”고 호통치기도 했고, 한 시대의 대표 지식인도 “엔지니어들의 ‘이상한 장난감’으로 도박하는 것”이라고 격하시켰다. 그러나 이는 분산기장 방식의 매트릭스에 대한 몰이해로 치부되었고, 탈중앙 기반의 탈(脫)불평등을 염원하는 사회적 욕구에 대한 몰상식이라는 비판이 더 컸다. 대신에 상호의존과 공존의 네트워크를 유도하고 정책을 설정하라는 조언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점잖은 담론이 무색해질 판이다.

앞으로 암호화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물론 현재로선 난망한 일이다. 그래서 이 즈음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왜 ‘신뢰’를 ‘신뢰’하였는가?”-. 코인 전문가 노엘 에치슨은 최근 한 기고에서 “우리는 그 동안 ‘중앙집중식 분산’을 제공하는 자를 신뢰하는 뿌리 깊은 습관에 빠졌다.”고 자책했다. 맞는 말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탈중앙을 사모하였건만, 실제론 탈중앙을 관장하는 중앙에 대한 예속을 자청하며, 그 집행자로서 FTX와 같은 거래소 권력에 무한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들은 FTX의 대차대조표엔 관심없었고, 코인 루트에 대한 포렌식도 없었으며, FTX 이사회엔 코인 투자자가 왜 한 명도 없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단지 돈놓고 돈먹는 재미, 스마트 기술로 포장된 화려한 서사, 젊은 야심가의 위선적 성공이 주는 대리 만족에 급급했다. 눈앞의 화려한 홀로그램에만 취한 것이다. 그렇게 시장의 핵심을 사유하는데 실패한 대가가 오늘의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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