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유분수다. 세월호의 트라우마도 아직 그대로인데, 어떻게 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많은 아까운 청춘들이 어떻게 그리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프고 슬프고, 안타깝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주말 심야의 이태원 참사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또 한번 찢어놓는다. 정녕 첨단 디지털 문명을 자처하는 이 시대는 ‘생명의 언어’ 따위는 결코 허락하지 않는 잔인한 잿빛 디스토피아인가.
그 마지막 순간, 어린 청춘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섭고 절망스러웠을까. 사람들에 짓눌리며 숨이 끊어져간 단말마적 모습을 상상하면 그 비통함에 가슴이 저민다. 그럼에도 산 자들은 별 도리없이 무력할 뿐이다. 그저 안타까운 영령들의 명복을 간절히 비는 것 밖엔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다. 젊은 생명들과 맞바꾼 이 시대의 몰상식에 대해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접어두자. 대체 언제까지 ‘안전’에 대한 이런 기만적 생태계를 방치할 것인가 따위의 물음도 일단 미뤄두자. “안전에 너무 ‘집착’하기보단,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위정자 일각의 잔혹한 성정도 새삼 따지고 싶지 않다. 지금은 그저 숨져간 청춘들의 평안한 안식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하긴 SNS나 유튜브로 사고 직후의 처참한 모습들을 생중계하는 파렴치한들을 일일이 탓할 여유도 없다. 그러기엔 눈앞의 슬픔이 너무나 크다. 목격자들이 촬영한 영상이나, 시신들이 바닥에 눕혀져있는 사진들을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파괴적 유희로 소비하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를 비판한답시고, 자사의 기사 말미에 해당 동영상을 다시 걸어놓는 언론의 위선적인 망동 따위를 탓할 기력도 없다. 그러기엔 슬픔의 의미가 너무나 중대하고 버겁다. 그 대신 가신 분들의 평안과 명복을 오로지 기원할 뿐이다.
사고 직후 목격된 일부 정신착란적 현실도 당장은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타인 대신 자신이 고통을 감내한 것이 아니므로, 사망자들에 ‘희생자’라는 말 쓰지말라”는 댓글 정도는 약과다. “외국인들과 마약이 판치는 이태원에 몰려든 자체가 의심스럽다”거나, “놀러갔다가 운없어서 사고로 사망한 것” 따위의 조롱 앞에선 할 말을 잃는다. 허나 당장은 이를 탓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인간 최후의 운명에 희생된 불행한 맥락은 외면한채, 한낱 어휘의 쓰임새를 공박하는 ‘몰(沒)이성’은 그럴 값어치조차 없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이기를 포기하는 막장의 지껄임들을 일일이 나무라고픈 기분도 아니다. 그런 여념이 있다면, 아까운 영령들의 명복을 한 번이라도 더 소원하는게 온당하리라.
클라우드 슈밥 이래 누군가도 그랬다. 4차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더욱 가혹하게 진화된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켠에선 인공생명(AL) 운운하며, ‘죽음’ 또한 얼마든지 ‘영생’으로 치환되는 대상이라고도 했다. 그리곤 포스트휴먼을 운운하곤 한다. 참으로 방자한 몰골들이다.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차대한 인류 절체절명의 숙명이다.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초(超)형이상의 비극이며, 하이데거가 뭐라했든, 모든 것의 제로베이스로서 ‘무화(無化,nihilation)’일 뿐이다. 그래서 그 반어적 깨달음은 곧 생명에 대한 외경이며, 숨쉬는 생명체로서의 인간 존엄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지금 세상에 묻고 싶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듯, 그 감정의 내면으로 들어가며, 육화(肉化)된 울림을 함께 하면 어디가 덧나는가. 기술만능의 쓰나미 앞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같이 느껴보는게 그다지도 화가 나고 손해날 일인가. 아무쪼록 이 비극 앞에서 옷깃을 여며보자. ‘재발 방지’니, 안전불감증이나 하는 작위적인 관념 언어는 그것대로 유통되게 하고, 섣부른 위로도 삼가자. 그 대신 황망간에 생떼같은 자식을 먼저 여읜 부모들의 무너진 억장처럼, 우리네 가슴도 함께 무너져보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랬다. ‘이성의 시대’는 가고, ‘공감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그건 어떠한 기계 알고리즘도 흉내낼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 그래서 더욱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어떻게 이런 처참한 일이 있는가 말이다. 가슴을 치며 애통해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