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미 상원통과, 대통령 서명 끝날 때까지 한국 정부 ‘수수방관’
뒤늦게 ‘한국기업 예외 인정’ 읍소 나섰지만, ‘소잃고 외양간’ 비난
일본, 민․관 일체, 5월부터 ‘키맨’ 조 맨친 상원의원 겨냥, 맹렬한 로비
유럽 7개사, 일본 2개사 ‘예외’, 현대차 등 한국기업만 따돌린 셈
경제전문가들 “전기차․배터리 뿐 아니라, 한국경제 자체에 치명적” 우려
[애플경제 김홍기 기자] 미국 의회와 바이든 행정부가 이른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발효하면서, 국내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선 이들 산업의 국내 경제적 위상에 비춰 자칫 한국경제 전반에도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이다. 그래서 전문가 일각에선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이 잘못하면 ‘한국경제 감축법’으로 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인플레 감축법’은 겉으론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기후변화 대응, 의료비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차세대 유망산업인 전기차와 배터리의 생태계를 미국 중심으로 재구축한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특히 전기차 업종의 경우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에서 채굴되거나, 가공된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한 배터리를 장착해야 한다. 또 북미에서 생산되거나 조립된 부품이 50%를 넘어야 한다. 그런 기업과 제품에 대해서만 평균 7500달러 가량의 보조금과 함께 세금공제혜택을 준다. 이는 실제론 중국산 전기차나 배터리 등을 산업 생태계에서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법대로라면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로선 전적으로 중국산 배터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시간 내에 거래처를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또 SK, LG 등 배터리업체들도 적잖은 불이익을 당할 전망이지만, 당장 이렇다할 만한 대책은 없다. 그렇다보니 이들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GM사나 심지어 일본 혼다 등과 합작, 미국 현지에 배터리 공장을 서둘러 짓기로 하는 등 생존책 마련에 부심하다.
그러나 당장 발효된 이 법에 대응할 만한 대책은 없어서, 국내 기업들로선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이에 뒤늦게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당국자나, 전경련과 해당 기업들이 서둘러 미국 현지의 관계자들을 찾아가 ‘예외’ 허용이나 해결책을 호소하고 있지만, 결과는 비관적이다. 이처럼 미국 ‘인플레 감축법’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선 지난 몇 개월 동안 미 의회의 입법과정을 수수방관한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한 기업체 홍보실 관계자는 “그 동안 뭘하고 있다가, 이미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는 식으로 허겁지겁 미국 조야를 찾아 읍소하는 모습이 한심하기만 하다”면서 “진작에 의회에서 법안을 심의할 때 적극적으로 우리 입장을 반영시켰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법안은 지난 8월 7일 미국 상원에서 가결된 후 8월 12일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이 8월 16일 법안에 서명하면서 발효됐다. 그래서 그 전부터 의회와 백악관을 대상으로 적극 ‘로비’를 펼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 정부는 지난 번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과도 어떤 교감도 없었고, 낸시 팰로시 하원의장처럼 영향력이 큰 인사의 방한도 그냥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미국 시장을 두고 우리와 다투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우리 정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미 지난 5~6월경부터 일본은 민간기업과 일본 정부, 그리고 현지 대사관 등이 총력으로 의회를 대상으로 로비에 나섰다. 이들은 특히 하원을 통과한 이 법안이 상원을 통과하기 위한 ‘키’를 쥐고 있는 조 맨친 상원의원을 표적으로 삼고, 맹렬한 로비를 벌였다. 조 맨친은 바이든 대통령이 문제의 법안을 최종적으로 서명한 다음, 옆에 있는 그게 서명에 사용된 만년필을 직접 ‘선물’로 넘겨줄 만큼 영향력이 큰 인사다.
미 상원은 여야가 동수여서, 민주당 소속의 카멜라 부통령이 상원의장 자격으로 찬성할 경우 통과가 가능하다. 그러나 의외로 공화당 소속인 조 맨친 의원이 반대 입장을 표명, 가부 동수가 됨으로써 통과가 불투명하게 되었다. 알려지기론 맨친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 민원사항을 두고 백악관과 모종의 ‘딜’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런 틈새를 파고 들며, 정치자금 등 다양한 ‘선물’을 제시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지 사정에 정통한 한 업계 관계자는 “다른 요인도 있지만, 일본의 그런 물밑 거래도 맨친이 법안에 찬성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했다. 실제로 일본의 로비는 꽤 먹혀든 것으로 파악된다. ‘인플레 감축법’에 의하면 미국 내에선 미국산 전기차만을 판매하되, 원산지 규정 등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조건으로 유럽의 7개 기업, 그리고 일본의 도요타, 혼다 등 2개 기업이 ‘예외’로 보조금 혜택 등을 받게 되었다.
결국 세계 주요 전기차 및 배터리 업체 중에서 한국기업만 빼놓은 셈이다. 일각에선 한국 현대차의 전기차 기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자신들을 추월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테슬라와 일론 머스크의 입김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난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개월 동안 뒷짐지고 있다가 뒤늦게 ‘외양간 고치기’에 나선 한국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게 업계 안팎의 비판이다.
더욱이 17일 바이든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고 발효가 된 다음날에야 비로소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들은 해당 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했지만, 그마저도 오히려 ‘뒷북’이란 비판을 호되게 받고 있다. 그래서 증권가 애널리스트 중에선 “자칫하다간, 가뜩이 어려움에 처한 한국경제가 이번 일로 펀더멘틀 자체가 휘청거리며, 낙오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해당 기업들로선 부랴부랴 자구책을 서두르고 있긴 하다. 특히 배터리 분야 세계 1위를 달리는 LG에너지 솔루션은 최근 제너럴 모터스와 합작한 23억 달러 규모의 오하이오주 합작 배터리 생산 공장을 서둘러 가동했다. 이번에 준공된 280만㎡의 ‘Ultium Cells LLC’ 공장은 GM 전기 자동차를 공급하기 위해 미국에서 계획한 최소 4개의 공장 중 첫 번째 공장이다.
LG전자와 LG엔솔은 또 오하이오 주에 44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또 LG엔솔은 최근 일본 혼다와 합작해 미 현지에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를 짓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 LG와 혼다 모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북미 시장에서 혼다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를 생산하기 위해 44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현대차는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105억 달러 상당의 전기차 혹은 배터리 공장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한국산 전기차와 배터리의 절박한 처지를 바꾸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에 10개 자동차업종들로 구성된 자동차산업연합회(KAIA)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발표된 직후 입장문을 통해 깊은 우려와 함께 대책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 법으로 미국의 전기차 시장점유율 2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산 전기차가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해 산술적으로 매년 10만여대의 전기차 수출 차질 발생이 우려된다”면서 “이 법안에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만 세금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한국산 전기차는 대당 최대 7500달러, 한화 약 1000만원의 보조금 혜택이 사라져 시장경쟁력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연합회는 그러면서 “이로 인해 국내 생산물량 감소 등으로 완성차업계는 물론 내연기관차의 전기차 전환 등으로 애로에 처한 국내 1만3000개 부품업체들이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연합회는 특히 미국의 이번 법이 WTO 규정 및 자유무역협정(FTA)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대해 북미산 전기차와 동등한 세제 혜택을 줄 것”을 요청했다.
연합회는 정부의 무능과 직무 태만에 대해선 선뜻 비판을 가하진 않았지만, 대신에 “전기차 보조금 제도 개선, 전기차 수출업체에 대한 한시적인 법인세 감면, 전기차 수출보조금 지원 등의 대책”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움직임은 이미 법안에 대한 미 대통령의 서명까지 끝나고 발효된 마당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란게 전문가들의 비관적인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