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수십 년 전 무작정 몽골로 내달렸다. ‘죽으면 독수리의 밥이 되고 싶어 몽골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지인의 말도 귓가에 남았거니와, 인공적이지 않은 손때 묻지 않은 드넓은 초원이 무엇보다 보고 싶었다. 그곳에는 ‘길’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포장도 되지 않아 덜컹거리며 가다가 다시 다른 길로 가기를 반복해야 했던, 그런 ‘길’이 많았다. 여행객들은 짜증을 냈지만, 현지인 관광 가이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저 다른 길을 찿았다. 그러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넋을 놓기도 했고, 무작정 길을 찾아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린 대부분 삶의 길목마다 세워진 이정표대로 산다. ‘가야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며 산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우리에겐 이미 정해진 길이 있다. 몇 살까지 기저귀를 차고, 또 몇 살까지 한글을 떼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이 가는 대학교, 그것도 명문대를 가기 위해 기를 쓴다. 전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간판’이 중요할 뿐이다. ‘영끌’을 해서라도 내집을 마련해야 하고, 남들처럼 고급아파트와 ‘글로벌 스탠다드’급의 소비와 소유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인생 스케줄대로 살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적어도 이 땅에선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도 없고, ‘하류 인생’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걸 고집할 수도 없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공동체 가치를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저항’은 개인주의로, ‘개성’은 공동 가치를 파괴하는 ‘이단’으로 간주되며, 남들과 같은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당한다. 각자는 자신만의 가야할 길보다는 그저 남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표절하느라 급급해할 뿐이다. 그렇다보니 모든 것이 계량화, 서열화되고, 지표로 매겨지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다. 그래서 배낭 하나 메고 훌훌 떠나는 노마드의 길은 적어도 이 땅에선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나 어쩌랴. 디지털 시대는 그런 노마드의 길이야말로 가야할 좁은 길이다. 디지털 문화는 기존의 서사를 해체하는 일탈의 세계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껏 옳다고 여겨왔던 소유 지상주의나 맹목적 효율, 엄숙한 공동체적 명령 따위는 해체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갖다 버려야 할 허드렛 이삿짐 신세가 되고 있다. 그 보단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펴면서, 오로지 새로운 경험에 투자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미래’를 미리 가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익숙한 우리 삶의 반경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누군가 “대한민국은 디지털 노마드의 갈라파고스”라고 했을까.

필자의 한 지인은 그랬다. “나이 오십을 넘기며 생각해보니 똘똘한 집 한 채만이라도 남겨지기를 바라며,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담보잡힌 지난 날이 너무나 아쉽다”고. 노래, 그림, 책, 여행 등 그 어떤 작은 여유도 없이 집 한 채와 맞바꾸며, 모든 걸 포기해야 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1년 중 단 하루도 개인적인 사유로 휴가를 내지 않았고, 감기나 몸살도 가능하다면 주말이나 휴가 기간에 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가족을 위한 주말 나들이도 꿈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 와선 숨이 막힐 만큼 후회스럽고 답답하기만 하다고 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는 1965년 희곡<출구 없는 방>에서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라고 했다. 타인들이 나를 판단하는 잣대로 나 자신을 판단하는 세상이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타인의 뜻에 따라 사는 사회를 하급사회로 규정하고, 그런 삶을 타락으로 보았다. 그렇다. 오로지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 그것을 위해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 사회에선 자칫 도중에 길을 잃고 만다. 스스로의 통찰에 의한 삶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똘똘한 집 한 채’에 인생을 저당잡힌 필자의 지인처럼, 보이는 것과 남들이 가는 길이 전부인 것처럼 믿게하는 타자적 삶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지금 디지털 시대는 달라져야 한다. 타자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향유하며, 자신에게 관대하며, 나만의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물질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며,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충실히 좇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늘 또 다른 존재를 채굴하고 질문할 때 소위 ‘창의’와 ‘상상력’이 솟아나고,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문법이 탄생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방랑하는 노마드는 애시당초 이삿짐이 없다. 훌훌 털고 자유롭게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집과 자동차에 드는 재화와 시간을 모두 경험에 투자한다. 몽골 징기스칸 부대는 머나먼 장정을 떠날 때도 오직 말 한필과 칼 한자루가 전부였다. 보급은 점령지에서 하면 되었고, 언제든 번개처럼 돌진하며 전진할 수 있었던 사상 최강의 부대였다. 디지털 노마드의 징기스칸 버전이었다.

앞서 말한 필자의 지인은 이제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한다고 했다. 잘 걷지 못하는 아이가 걸음마를 연습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물어 자신이 행복할 만한 일을 찾고 있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위한 길을 간다고 할까. 문득 생각해보니, 몽골 여행에서 만났던 몽골인들은 참 따뜻하였다. 네비게이션과 이정표 없이, 물어물어 가는 초원의 길은 불편했지만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그런 낯설지만 자유로웠던 길로 다시 한번 떠나고 싶다. 디지털 노마드의 길을 찾아서….

(고양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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