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갤럽 조사는 “전 세계 노동자 중 13%만이 ‘하는 일이 좋아서’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는 어떨까. 가트너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IT 직원의 3분의 1 정도만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미국에선 이른바 ‘대퇴사(退社)’ 내지 ‘대사직(Great Resignation)’ 열풍이 불고 있다. 미국뿐 아니다. 유럽과 세계 각국으로 번지면서, 국내에서도 어렴풋이나마 그 징조가 감지되고 있다.

그 원인은 물론 복합적이다. 표면적으론 팬데믹으로 인한 감염 공포, 자산가격 상승과 재난지원금 등 이전소득에 의한 경제적 만족, 고소득 전문직의 은퇴 등이 꼽힌다. 그러나 그 행간에는 의미심장한 각성이 엿보인다. 결코 직업에 대한 부적응이나 태만함 따위는 아니다. 한 직장에 대한 충성도가 옅어진데다, 눈앞의 물질에 연연하기보단 자신에게 좀더 가치있는 삶을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진짜 이유다. 말하자면 소유보단 존재의 삶에 눈을 뜬 셈이다.

그런 점에서 ‘대퇴사’를 둔 평가는 중요치도 않고, 온당하지도 않다. 그 보단 좀더 원색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꼭 일을 해야 하는가?, 혹은 일과 임금노동이 있어야만 의미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가? 생존을 위한 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는가? 따위다. 나아가선 ‘임금노동만이 인간성을 정의하는 활동’이란 칼 막스의 유물론적 규정이 정의로운가 물어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규칙적인 유급노동의 역사는 길지 않다. 일과 근면이라는 신교도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가 1차산업혁명과 겹치며 근대적 일상의 태도로 자리잡은지 불과 수 백 년이다.

그런 유급노동의 이데올로기는 비정하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되다보니 인간 자신을 위한 인본적인 활동의 가능성을 대부분 차단하거나, 인간의 자율적 동기를 쳇바퀴 일상에 가둔채, 수명 짧고 제한된 소모품을 마구 찍어내고, 일정한 생산 수준을 위해 생태파괴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유급노동을 요구하는 자본가들은 맹목적인 경제성장을 ‘탈(脫)실업’으로 포장하고, 잡다한 서비스와 쓸모없는 상품을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취한다. 그게 유급노동의 동기이자, ‘노동자’들과는 무관한 숨은 의도다.

그래서 과격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고민하는 많은 지성들은 ‘탈(脫)노동(postwork)’을 주문한다. 이는 기술혁신과 기술만능의 세상을 제압할 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 해법을 고민한 결과다. 이들은 유급노동을 신성시하는 직업윤리 대신,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그런 세상에선 기계 탓이라며 ‘기술적 실업’을 원망하기보단, 되레 기계에 의한 완전실업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럼 어떻게 될까. 노동자들은 임금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일의 주체가 되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허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소비에트 강령이나, ‘임금 노동자들만 사회적 생산물의 소유권이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모든 시민은 모든 공유자원의 사용 이익을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데이비드 프레인의 정의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유급노동은 애초의 인간조건이 아닌, 물질 축적의 조건이었을 뿐이다. 그래서다. 임금에 매인 노동을 부정한 ‘일하지 않을 권리’가 이젠 미래 세상의 준거틀에 대한 공동체적 논의로 승격될 만한 시점이다.

그럼 ‘인간은 놀기만 하려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기계에 맡기는 건 노동일뿐, 모든 ‘인간적 활동’은 다시 회복된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인 내지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진다. 고된 노동일랑 로봇에 맡기고, 인간은 자유롭게 인간성에 충실한 활동을 하며 값있게 살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사익 추구에 덜 개입하면서도 값있는 성취를 도모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탈노동’의 삶의 지평에선 ‘일하지 않을 권리’가 천부의 권리가 될 것이다. 미국의 ‘대퇴사 현상’은 그런 ‘권리’에 대한 각성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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