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물리적 충돌과 함께 사이버 공간으로도 그 불길이 번지고 있다. ‘번진다’기보단, 군사력 동원 이전부터 이미 사이버 공방전이 먼저 시작되었다. 초기엔 ‘공방전’이 아닌, 주로 러시아 일방의 공격이었다. 탱크가 국경을 넘기 전에 이미 우크라이나의 기간산업이나 정부 등 공적 영역의 네트워크에 디도스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야말로 온․오프라인 양동작전이라고 할까. 현실과 사이버 공간이 버무려진 또 하나의 21세기 버전의 인류사적 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와중에 제일 바쁜 부류는 해커, 특히 러시아 해커들이다. 이들은 우크라 침공 전부터 이미 인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수백 대의 컴퓨터를 악성코드로 감염시켰다. 우크라와 서방에 우호적인 이들 나라의 기간 네트워크부터 먼저 제압하고 보자는 것이다. 웹사이트들을 정크 트래픽으로 공격하여 접속 불가로 만드는 디도스 공격이나, 악성코드를 조합하는 방식을 이들은 구사했다. 그 결과 피해도 컸고, 사이버 운영 플레이북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뿐 아니다. 그 선봉에 선 러시아의 ‘관영 해커’들은 러시아 침공이 있기 전에 미리 미국 내에서도 데이터 전송 악성코드를 이곳저곳에 흩뿌렸다. 물론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사이버 무력은 이제 물리적 군사력과 동등한 전쟁 도구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친서방 정서의 해커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국제 해킹 집단인 어나니머스는 수 일 전부터 러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역공을 펴고 있다. 크렘린과 국영 언론사, 기간 산업체와 금융기관 등을 가리지 않고 맹폭을 가하고 있다. 가히 사이버 세계 대전이다.
21세기에 도래한 이진법적 디지털 문명은 이처럼 대량 살상의 무기로 그 야누스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애초 사이버 공간과 그 작동 원리의 바탕은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애초엔 선한 의지로부터 태동했다. 사이버 공간에서 상품과 문화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원활하게 거래되도록 매개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그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은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였다. 신뢰할 만한 네트워크상의 사이버 행동을 통해 개인과 사회, 국가의 평판이 형성되고, 서로 존중할 만한 언어를 공유하는 관계망이 만들어지길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러시아 침공은 그런 ‘선함’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간 랜섬웨어나 멀웨어, 디도스, 다크웹은 주로 민간 영역의 사익을 탈취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속내는 어떨지언정 적어도 국가나 정부라면, 이를 규탄하고 배척하는데 이의가 없었다. 그저 사이버 범죄이며, 처단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달라졌다. 국가와 국가 간 무력충돌과 총력전의 전위(前衛)이자, 범죄 행위가 아닌 공적 자위의 수단으로 대접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간 네트워크를 선하게 작동시켜온 상호작용과 신뢰와 언어, 공유,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던가 싶을 정도다.
한 술 더떠 암호화폐나 가상자산까지 전쟁 무기가 되고 있다. 비트코인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는 움직임이 전 세계 가상자산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지원하는 단체인 컴백 얼라이브(Come Back Alive)가 단 이틀 동안 100만달러어치의 비트코인을 기부받기도 했다. 이에 가만있을 러시아가 아니다.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돌파하기 위해 다크웹 ‘히드라’나 해커들까지 동원해 암호화폐 밀거래에 나서고 있다. 실상 러시아는 오늘의 사태를 준비라도 하듯,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인 ‘디지털 루블’을 개발해왔다. 바이든 행정부의 제재와 차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암호화폐를 통해 결제하고 송금도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게릴라 전사들이라고 할 해커들은 오늘도 사이버 전장을 누비며, 제재의 틈새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러시아와 우크라 군대의 치열한 교전, 그 뒤켠에서 저열한 사이버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 시대는 인류 전쟁사를 새로 쓰고 있다. 물리적 총력전 너머 사이버 스페이스를 누가 더 잘 디자인하고 설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나다니엘 호손이 그랬던가. 지구 자체가 하나의 사이버 브레인(brain)이라고. 그렇다면 물리적 질서 뿐 아니라, 사이버 브레인의 지배자가 최종 승자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