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답게 또 다른 질병 치료와 치유법이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치료제’다. 혹자에 따라선 이를 외과적 처치나 약물, 주사에 이은 ‘4세대 신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언뜻 개념이 모호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이는 가시적 사물의 경계를 뛰어넘어, 의료기술을 이진법적 세계로 치환한 것이라고 하겠다. 즉 주어진 예후에 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자를 분석하고, 맞춤형으로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박하게 말하면 디지털 헬스케어가 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디지털 헬스케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일각에선 오락과 유희의 도구로만 여겨졌던 ‘사이버 게임’을 그 처방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게임학회는 게임을 디지털치료제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 깊이있는 논문까지 내놓았다. ‘게임’ 자체가 디지털 헬스케어로서, 마치 약처럼 환자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검증된 치료법을 기반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근거 기반 치료법’의 일환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관심을 끄는 주장이다.
흔히 잘 알려진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카트라이더 등의 게임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이 곧 치료제라는 주장은 사뭇 도발적이라고 할까. 그간 ‘사이버 게임’에 대한 인식을 뒤엎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하릴없이 유희만을 좇는 중독성 놀이”라는게 기성의 관념이다. 하긴 오프라인의 관성으로 보면 컴퓨터 화면에 그림과 영상으로 온갖 스릴과 서스펜스가 펼쳐진들, 기계 전원을 끄는 순간 모든게 스러지고 마는 허망한 잔상일 수도 있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흥분 기제로 가득한 해로운 놀이문화로 비칠 법도 하다.
하지만 이제 디지털 세상의 정서도 바뀌고 있다. 사이버 게임을 기반으로 한 메타버스가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주류로 등장하는 판국이다. 그간 사이버 게임에 동원되어온, 가상과 실재의 혼재 기법이 디지털 트윈의 모티브가 되었고, 게임 속 무한복제는 메타버스 공간에서 또 하나의 현전(現前) 기법으로 실용화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게임이 이젠 디지털치료제의 수단으로까지 등극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정신장애 치료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이라거나, 그 궁극적 목적은 화학약품을 대체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런 피상적 관찰 너머의 본질적 의미소(素)에 있다. “무릇 이건 이래야 한다”는 전래된 ‘유형화’에 우린 익숙하다. 우리네 문명도 흔히 그 유형들로 만들어진 마스터플롯을 실현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오죽하면 사르트르도 “내 평생은 마스터플롯에 맞는 유형대로 살아온 것일 뿐”이라고 했을까. 그런 눈으로 보면 인간과 사물을 특정 유형으로 한정하는 일은 자칫 좁디좁은 편견과 무심한 폭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보면 ‘사이버 게임’을 오로지 유희로만 간주해온 것도 그런 유형화의 일종이었고, 이를 디지털치료제로 승격시킨 것은 그에 대한 전면적인 도발이자 전복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기대를 걸어볼 만도 하다. 사이버 게임이 해악은커녕, 되레 인류 건강에 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해 충분한 문화적 인격을 부여할 수도 있다. 그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캐릭터나 스토리가 인간의 정신적,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이로운 문명의 이기임을 승인하는 것이다. 가상의 온라인공간에서 펼쳐지는 온갖 상상소(素)의 파노라마를 통해 마치 온몸이 흠뻑 땀에 젖듯, 치유의 쾌감을 맛볼 수도 있음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선입견에 포위당한 자격지심이랄까. 게임학회는 “‘게임’이라는 용어가 (디지털치료제 적용 과정에서) 포함되지 않는 것이 치료 효과와 인식을 높이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게임’이라는 용어가 포함될 경우, 자칫 유희 목적으로 오인되고, 치료제로서 효능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 만큼 인식의 벽이 두터움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디지털치료제의 빈칸에 ‘게임’이 언급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하겠다. 좀 거창하게는 ‘디지털 시대’다운 변형과 제네시스의 일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