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왕가위 감독이 제작한 홍콩영화 <중경삼림>을 기억하는가? 총 2부로 구성된 옴니버스물인 중경삼림은 1부에서 인도인들과 함께 마약을 거래하는 여주인공 임청하와 사복경찰 금성무, 2부에선 어느 허름한 인도식 케밥집을 자주 들리는 순찰경관 양조위와 케밥집 점원 왕페이의 이야기가 묶여서 하나의 영화를 이룬다. 거기서 임청하가 인도인들과 함께 마약을 거래하고 양조위가 비번 때 자주 들리던 케밥집이 있는 허름한 건물이 바로 청킹맨션(重慶大廈, Chung King Mansion)이다. 청킹맨션의 청킹은 중국 중서부 대도시 충칭을 광동어로 읽은 것이다.
청킹맨션은 이렇게 영화 배경으로 나와 뭔가 몽환적,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준 곳이지만 사실 이곳의 실상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아 보인다. 이 곳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중국계 홍콩인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다 환전하러 오는 사람들만 조금씩 보일 뿐이다.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온 이슬람권 위주의 외국인들이다. 홍콩에서 중국계 홍콩인 로컬사람들이 모국어로 쓰는 광동어(廣東話)나 중국본토인들이 쓰는 표준중국어(普通話)가 아닌 파키스탄의 국어인 우르두어(Urdu)가 더 많이 들리며 사람들 얼굴도 동양계가 아닌 검은 사람들 즉 남아시아/중동인이나 흑인들이다.
그 곳은 “홍콩 속 작은 지구” 내지는 “홍콩 속 아랍”으로 불리는 이국적인 신비한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이 발을 들이면 나올 수 없는 “마굴”이기도 하다. 과거 구룡성채(九龍城砦)가 살아있을 시절엔 구룡성채와 이곳 청킹이 양대 마굴이었지만 이젠 구룡성채가 사라지고 이곳뿐이다. 마굴이라는 무서운 별명답게 청킹에선 마약제조 및 거래, 성매매, 불량식품 제조 및 유통, 불법도박 등 각종 기상천외한 탈법적인 일들이 일어나며 싼 방값으로 유혹하는 싸구려 호스텔/게스트하우스(여관)에 멋 모르고 들어가는 여행객들은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오죽하면 이 곳을 한때 “외국인이 생존 가능한 시간은 불과 24시간”이라 했고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 잘린 팔을 보았다”, 심지어 “자고있는 사이에 몰래 누군가 마약을 주사했다” 같은 믿기 힘든 이야기들까지 나왔을까.
청킹맨션, 이 곳은 그렇게 도심 한복판, 그것도 홍콩에서도 알짜배기 땅으로 서울 충무로나 종로에 해당하는 침사추이(尖沙咀, Tsim Sha Tsui) 한복판에 위치한 “홍콩의 이미지를 잡치는 흉물”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러한 색다른 면모와 영화 덕분에 “홍콩의 명물”이기도 한 아이러니한 곳이다. 존재 자체가 부조리인 셈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청킹은 당장 헐려 재개발되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곳이 재개발될 특별한 계획은 없다. 왜 그럴까? 홍콩인들의 인내심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다. 다음과 같은 크게 두 가지가 되는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첫번쨰는 청킹이 갖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그 이유일 것이다.
청킹맨션은 영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배경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곳은 그 자체가 미 뉴욕시 할렘의 아폴로 극장처럼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곳이다. 아폴로 극장이 허름하고 주변부가 아직도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그 곳에서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클 잭슨 같은 수많은 흑인 가수들이 탄생했다. 미국 문화의 또 다른 축으로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의 세련된 상류문화와는 또 다른 하위문화인 흑인 문화와 히스패닉들의 스페인 문화가 할렘에 고스란히 자리잡았다. 그래서 뉴욕의 진짜 마스터피스는 사실 할렘의 허름한 건물들인 것이다.
청킹도 마찬가지다. 세련되고 미래도시 같은 홍콩섬하고는 또 다른 홍콩의 “하위문화”가 자리잡은 곳이다. 하늘 꼭대기에 닿는 고층빌딩에 파묻혀 사는 재벌들과 또 다른,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나 불법체류자들이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곳이며 그런 하위문화가 영화에 투영되었다. 그러한 부조리한 맛이 홍콩의 매력이다. 더구나 청킹맨션 특유의 인도음식 냄새와 눅눅한 분위기, 희미한 전등 불빛 등은 신비주의적이고 몽환적인 매력을 준다. 거기에 홍콩 내 남아시아인 커뮤니티 역사, 그리고 홍콩 이슬람 신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가치도 분명히 있다. 건물 자체가 고급 아파트였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곳이니 격동의 현대사를 직격으로 맞은 곳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난민 주거”문제이다.
홍콩에는 오늘날 인도/파키스탄/네팔/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남아시아 국가들을 위주로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까지 온 난민들이 가득하다. 청킹맨션과 엮인 나라들만 해도 총 120개국이다.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휴대전화의 20%가 청킹을 거쳐간다는 말도 있다. 여관에 있는 인터넷룸에는 인터넷 전화로 국제전화를 하며 고향의 가족,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다양한 언어가 들린다. 청킹맨션의 싸구려 여관들이 이들의 보금자리다. 특히 한국인 눈엔 끔찍하고 역겨워 보이는 도미토리도 사실 난민들에게는 가족 단위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난민들 중에서 이 곳에 터를 잡고 대가족이 사는 사람도 많다.
난민 말고 필리핀/인도네시아 출신 가정부들도 대게 청킹에 기숙사를 두고 고용주 집으로 출퇴근한다. 홍콩의 아파트들은 실내가 너무 좁아서 가정부에게까지 숙식을 제공할 수 없어 숙식은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그래서 그 보상으로 청킹이나 미라도 맨션의 싸구려 여관 도미토리에 기숙사를 잡아준다. 미라도는 그래도 좀 낫지만 청킹의 기숙사들은 열악하고 우중충하다. 한국인이나 홍콩인이 볼 땐 “왜 저런 쓰레기 집에서 살까” 하겠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는 그곳도 보금자리다. 그 보금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홍콩 정부가 홍콩인들 살 집 마련하기도 힘든 마당에 굳이 난민까지 고려해줄 여유 따위도 없다.
사실 청킹맨션도 몇 차례 철거 및 재개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이유들이 이를 막았고 오늘날에도 청킹은 “홍콩의 흉물”이자 “홍콩의 명물”로 세월의 흔적을 비껴가며 현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