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경제 김건주 전 서울신문 제작국장·현 서강출판포럼 회장 ]
추석날 어머니를 서울 집으로 모셔왔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두 달여 만에 큰 아들 집에 오신 어머니는 모든 게 새롭다. 평생을 농촌에서 사신 어머니의 눈에 비친 신축 아파트는 낯설기만 해서 오신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혼자서는 언강생심 바깥출입 엄두를 못 내신다. 번호 키나 카드키에 익숙한 사람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편하게 이용하지만 어른들에겐 신축 아파트마다 통과해야 하는 두세 과정의 출입문이 하나의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실 때의 두려움 때문이다. 집안에서도 좀처럼 무엇인가 하려 들지 않으신다. 디지털화된 집안 곳곳의 살림살이는 손을 움츠러들게 하고 자질구레한 집안일마저 엄두를 못 내게 하시나 보다.
생활공간에서의 작은 변화이지만 이렇듯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노인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소외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인생무상, 세월유수라는 물결에 밀려 뒷방 늙은이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은 더욱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도 한때는 젊음의 열정을 쏟아 부으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이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디지털 시대는 어떤 의미인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류사를 돌이켜봤을 때,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장시켜왔다. 네발로 움직여야했던 평범한 포유동물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손’에 대한 자유를 허락받았다. 자유롭게 된 손은 평범한 인간을 무한 경쟁력으로 무장시켜 정글을 지배하게 되고 자연의 일부분에서 마침내 자연에서 군림하는 존재로 확장되는 혁명적 경험을 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기반은 이렇듯 인류사가 보여준 끊임없는 확장의 기반 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디지털(digital)은 데이터 구성의 최소단위, ‘0(off)과 1(on)’의 두 가지를 사용하는 2진법에서 출발한다. 정보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아날로그가 모양으로 표시된다면 디지털은 정확하게 ‘0과 1’이라는 숫자로 표시되는 것을 말한다.
디지털시대를 상징하는 숫자, ‘0과 1’은 인간의 욕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높이 쌓을 수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불통으로 허망하게 허물어지고 만 것이 바벨탑이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능력의 최대 확장이라고 확신했던 디지털시대는 인공지능과 IT, ICT기술의 고도화를 통해 본격적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예언(?)했던, 바야흐로 초인(超人)의 시대가 도래 하는가? 이런 질문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지금 인류가 하고 있는 대부분의 노동은 AI가 하고, 인간은 마음껏 놀거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취미활동을 하는 등 ‘존재’에 충실한 일만 하면 된다. 그 동안 인간(노동자)을 혹사당했던 일을 AI가 대신한다. 하긴 AI는 혹사 끝에 수명을 다하면 다시 만들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행복할까? 인간이 디지털시대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문명의 노예로 산다면 행복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속절없는 방관자로 산다면, 결국은 초인적인 디지털 기술과 AI 문명의 종속자로 전락할게 분명하다. 어머니를 보면서 새삼 디지털시대의 인간소외를 떠올려본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과연 건강한 디지털세상, 따뜻한 AI 세상은 가능하기나 할까.
(전 서울신문국장,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