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가 또 한 번 ‘쇼 아닌 쇼’를 벌였다. 사람과 거의 흡사한 ‘테슬라봇’을 개발해 자사의 자율자동차에 접목하겠다고 대대적인 발표회를 연 것이다. 그러나 로봇 실물 대신 로봇탈과 복장을 한 이미지를 내세워 호사가들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한 발 나아가 머스크는 “개발에 동참할 천하의 인재들이여 모여라!”고 전 지구촌에다 대고 노골적인 ‘구인광고’까지 했다. 과연 머스크다운 해프닝이라고 해야겠다. 허나 그 요란스런 제스처에 담긴 의도가 어떠하든 새겨볼 대목은 있다.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는, 포스트 다위니즘 차원의 새로운 창조 개벽의 가능성이다.
그가 말한 ‘테슬라봇’은 인간을 닮은 로봇 내지 ‘기계로 만든 인간’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과학을 넘어서는 문제다. 장차 출현할지도 모를 인조인간의 전조(前兆)임에 분명할진대, 그것은 인과론적 진화생태계의 문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유기체적 탄생의 비밀을 되묻게 하는 대(大)사건의 시작이다. 하긴 4차산업혁명 숭배자들은 이미 단언한 바 있다. 미래의 인간세계를 ‘로봇자치(robot autonomy)세계’로 설명하면서 인간과 함께 로봇도 세상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과학적 예언’을 오래도록 해왔다.
휴머노이드는 로봇 기기(robot appliance)와는 종(種)이 다르다. 자율성은 없고, 그저 알고리즘에 따라 정해진 매뉴얼만 수행하는 애플리케이션에 불과한 로봇과는 전혀 다른 별종이라는 얘기다. 대신에 그것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하며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작용하고 설득하는 ‘기계로 만든 인간’이다. 그래서 미래공학자들은 이를 두고 로봇 행위자(robot agent)로 부르기도 한다. 스스로 ‘행위’를 함으로써 나름의 언어와 관점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이쯤되면 사실상 사람과 로봇이 나란히 미래 기술자본주의의 행위자이자, 주역이 아니될 수 없다.
이런 광경을 미리 그려볼 때마다 사변가들의 속내도 복잡하다. 그 중에서도 많이들 걱정하는 것은 인간의 일자리를 로봇에게 송두리째 빼앗길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작 허드렛일(긱)만으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거나, 로봇의 하수(下手)로 전락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반면에 이를 지나친 걱정으로 치부하는 현학자들도 많다. 하버드의 브라이언 메추 등이 그랬듯이 ‘새로운 시장의 혁신’이 대안일 수도 있다. 이미 존재하는 시장이 아니라, 또 다른 욕구와 고객을 자극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또 “인문학적 알고리즘으로 기계와 기술을 수단으로 부려야 한다”는 일련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작 해답은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질문의 어간에 있다. 왜 로봇을 만드는가? 왜 우린 AI와 양자컴퓨팅과 나노공학에 몰두하고, 합성생물학이니 디지털물리학이니 하며 디지털혁명에 그토록 목을 매는가? 그렇다면 답은 그 속에 있다. 섣부른 전망일 수도 있으나,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이란 단편적인 조바심보다는 ‘우리는 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 건가’를 먼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생전에 일본을 방문해 신칸센을 탄 덩샤오핑(鄧小平)이 그랬다던가. 일본인들이 “무척 빠르지?”라고 자랑하자 “어딜 가려고 이렇게 빨리 가는가?”라고….
정녕 기술발전의 무한질주, 그 끝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답이 있다. ‘로봇’은 본래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란 뜻의 체코어(語)다. 어원대로라면 미래엔 허드렛일을 서로 차지하려고 인간과 ‘노예’가 서로 다투는 격이다. 그래서야 쓰겠는가. 수 년 전 갤럽 조사는 “전 세계 노동자 중 13%만이 ‘하는 일이 좋아서’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기 싫은 일’일랑 로봇에 맡기고, ‘좋아서 하는 일’만 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꿈꿀 순 없을까.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은 로봇에 맡기고, 고용노동 바깥에서 다양하게 인간의 잠재력을 증가시킬 실존적인 ‘일’에 매진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테슬라봇 ‘소동’을 보니 또 그런 상념이 머릿속을 배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