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경제 박경만 주필]
디지털 문명은 말 그대로 ‘digit’, 즉 0과 1의 교접과 순환이다. 애초 라이프니쯔에서 발원했던 이진법은 마침내는 2진수 비트 배열의 21세기 기술 문명의 원리가 되었다. ‘모 아니면 도’의 확정적 상태인 0 또는 1 중 하나로 작동하며, 온(on)․오프(off)의 분절된 생성을 반복해왔다. 이질적인 데이터들을 0과 1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체계로 변환하고, 그 ‘다름’의 모순을 활용하며 온라인 문명을 거의 ‘특이점’ 수준에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생성의 원리에 중대한 변이가 생겼다. 바로 양자역학에 의한 양자컴퓨팅이다.
이는 기존 이진법적 질서를 근본에서부터 뒤엎는다. 이른바 ‘중첩(重疊)’과 ‘얽히고 설킴’을 통해 이원적인 0과 1을 새롭게 융합된 ‘의미’로 재생산해낸다. 곧 이분법적 ‘비트’가 아니라, ‘큐비트’로 작동하는 것이다. ‘큐’는 양자(Quantum)의 알파벳 두 문자이면서, ‘임의’(任意, random)라는 기호와도 맞닿는다. 큐비트는 비트와는 달리, ‘중첩’이라는 양자역학 원리를 통해 서로 다른 선택지들을 ‘임의로운’(랜덤의) 의미로 통합시켜 버린다. 그래서 ‘남자 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된다’는 서술도 가능하다. ‘살아 있음과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시에 죽은 것’이라는 형용모순도 모순이 아니게 한다.
큐비트와 큐비트의 사슬은 또한 서로 연결되어 얽히고 설킨다. 그로 인해 양자컴퓨팅은 큐비트끼리 맞물려 돌아가는, 병렬의 메트릭스에 의해 지수(무한 제곱)함수의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어떤 컴퓨터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와, 현재의 컴퓨팅 기술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처리 능력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계산하고 해독하며 라벨링할 수 있는 것이다. 양자컴퓨팅은 그래서 탈(脫)이진법의 새로운 변증법적 다이어그램이자, 디지털 문명의 유전자를 새롭게 설계하는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그럼에도 양자 컴퓨터는 기존 컴퓨터를 모조리 없앤다기보단, 융합과 초연결의 수단으로 더 유용할 것이다. 몇 초 이내에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데는 그 보다 좋은 기술이 없다. 다만 경계없는 사이버 보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방대한 데이터를 해독해내므로, 현존하는 그 어떤 암호화도 깨버릴 것이란 우려다. 그러나 역설적이라고 할까. 이미 양자컴퓨팅도 풀지 못하는 동형암호나 격자(lattice) 암호화의 기술이 발전하고 있어, 그런 우려도 기우가 될 조짐이다. 오히려 양자역학의 반작용으로 촉발된 뜻밖의 수확인 셈이다.
양자컴퓨팅은 빠르면 5년 이내 실용화될 것이라고 하나, 일단은 두고 볼 일이다. 다만 그 시기와는 별개로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진법 자체가 태생적으로 탈(脫)이진법의 원리를 잉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서 비롯된 가설이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나 애초 라이프니쯔는 주역의 음양오행론을 벤치마킹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음양이 ‘밀고 당기며’ 길항(拮抗․conflict)하는 역동적 태극의 조합을 그의 사유가 외면했을 리 없다. 즉 서로 다른 두 개의 항(二項)을 두고, 대립도, 화합도 아닌 무궁무진한 섞임과 중복을 통한 조화를 기획했을 수도 있다.
하긴 양자의 역학적 출발인 아(亞)원자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원자의 아류 아니던가. 양자컴퓨팅은 또한 낯설지만은 않은, 융합의 언어와도 닮았다. ‘표준화’로 정화하기보단, 비균질적이고 카오스적인 ‘섞임’이 그 작동원리다. 중첩과 얽히고 설킴으로 새로운 구획의 문명을 창조하는 도구라고 하겠다. 그 과정에서 경직된 이원화나 분절로부터 해방되고, 경계를 해체함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컴퓨팅은 ‘포스트 디지털리즘’을 향한 혁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