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예고하는 세계 반도체시장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지각 변동을 눈앞에 두고 있다. 컴퓨터및 서버 중앙기억장치(CPU)의 최강자 인텔은 기술경쟁에서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고, 스마트폰 두뇌 격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 시장을 장악한 ARM은 매물로 나왔다. ARM 매각의 영향은 예상하기 어렵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의 주가는 급등하고 있다.
인텔의 발표
인텔은 2분기 매출액이 197억3000만달러(약 24조원)에 영업이익 57억달러(약 7조원)였다고 밝혔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매출액 395억달러(약 47조원)에 영업이익 127억달러(약 15조원)로 세계 1위를 지켜냈다. 인텔의 실적을 삼성전자와 TSMC하교 비교하면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는 매출액 36조원에 영업이익 9조3000억원이 예상되며, TSMC는 매출액 211억2000만달러(약 25조원)에 영업이익 88억달러(약 11조원) 수준을 발표한 바 있다. 인텔에 이어 각각 2~3위다. 하지만 실적보다 주목받은 것은 인텔의 7나노 공정 적용 CPU 출시의 6개월 지연발표였다. 지난해 경쟁사인 AMD가 이미 7나노 CPU를 내놓은 상황이라 인텔의 기술 주도권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반도체 기판에 보다 가늘게 회로를 새겨넣는 초미세공정은 같은 면적 대비 성능 및 전력효율을 향상할 수 있어 제품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기술로 꼽힌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 1위인 TSMC와 손잡고 지난해 7나노 출시에 이어 5나노 칩을 개발 중인 AMD는 이로써 인텔과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게 됐다.
복잡한 시장상황
인텔은 PC와 서버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도 뺏기고 있다. 모바일 기기가 ARM 프로세서를 주로 활용하는 가운데, 운영체제 윈도를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삼성전자 등 노트북 제조사들도 ARM 프로세서를 탑재한 태블릿 PC를 출시하고 있다. 애플까지도 맥북에 ARM 아키텍처를 적용키로 하면서 '탈인텔' 현상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인텔의 고전이 반드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호재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인텔이 CPU의 95%를 점유한 서버 시장의 경우 사업자들이 신형 CPU 출시에 맞춰 서버 사양을 높이면서 이를 뒷받침할 D램과 낸드플래시 구매도 함께 늘리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PC) 역시 인텔의 CPU 점유율이 83%에 달해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인텔이 7나노칩 양산 과정을 일부 삼성전자에 위탁할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인텔이 칩 생산을 외부에 의뢰하더라도, AP 시장 등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삼성보다는 순수 파운드리 업체인 TSMC를 선호할 거란 관측이 적지 않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1위 회사다.
지난해까지만해도 삼성전자에 못미치는 실적을 기록했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 침체로 삼성전자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일단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업계 특성상 TSMC가 앞으로도 1위를 지켜갈 가능성이 높다. 안정적인 생산을 위해 보수적으로 수주를 맡기기 때문에 쉽게 업체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대만 시가총액 1위 기업인 TSMC는 주가가 급등하고 있다. 28일(현지시각) TSMC는 시가총액이 4100억달러(489조원)를 넘었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미국 대기업 존슨앤존슨과 비자를 제치고 세계 10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ARM은 매물로
4년 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사들인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은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세계 반도체 업계가 주목하는 매물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이다.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세계 스마트폰 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1990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설립된 ARM은 반도체의 기본 설계도를 만들어 삼성전자·퀄컴·애플 등 세계 1000여 기업에 팔고 로열티를 받는 회사다. 스마트폰의 두뇌인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에서 서버(대형컴퓨터)용 반도체, AI(인공지능) 반도체 등을 설계한다. 세계 스마트폰 AP의 95%가 ARM의 설계도를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퀄컴·애플은 ARM의 설계도를 기본으로 여기에 자사의 독특한 기술을 추가로 더해 AP 칩을 최종 설계한다. ARM의 반도체 설계도가 없으면 당장 스마트폰 핵심 반도체를 개발할 때 지금보다 엄청난 시간 지체가 불가피하다. 작년의 경우 ARM 설계도를 활용한 반도체의 생산 개수는 230억개다. ARM 창립 이후 누적으론 1600억개다.
매각의 이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016년 ARM을 320억달러(약 38조원)에 인수했다. 손 회장은 ARM의 설계도가 스마트폰의 영역을 넘어, 사물인터넷(IoT)에 쓰일 것으로 봤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사물인터넷의 혁신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인수는 결과적으로 실패다. ARM의 매출은 3년째 제자리걸음이다. 2017년 매출이 18억3100만달러(약 2조2000억원)인데 2년이 지난 2019년에도 18억9800만달러(약 2조3000억원)였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예전만큼 팔리지 않으면서 주력 사업군인 스마트폰 로열티 사업도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스마트폰 판매량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최대 시장인 중국의 매출이 절반으로 줄었다. ARM의 중국 법인 지분 51%를 1조원도 되지 않는 금액에 팔면서 지분법에 따라 중국 내 매출이 절반으로 감소한 것이다.
동요하는 반도체시장
소프트뱅크는 ARM 지분의 75%는 본사, 25%는 자회사 비전펀드를 통해 보유하고 있다. 블룸버그 등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주력으로 하는 엔비디아가 ARM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애플도 의사 타진 대상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매각이 쉽지만은 않다. 인수에 필요한 자금 규모부터 만만치 않다.
기업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텔의 PER(주가수익비율)이 18배 정도인데, 이걸 ARM에 적용하면 340억달러(약 41조원)의 기업가치"라고 보도했다. 그러니 적어도 40조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제시해야 ARM을 인수할 수 있다. 매출 2조원짜리 회사에 40조원을 제시할 곳은 많지 않다.
애플과 구글 등이 인수에 뛰어들 가능성도 점쳐진다. 특히 애플이 인수한다면 경쟁자인 삼성전자에게는 다소 부담일 수 있다. 엔비디아와 애플이 주로 TSMC와 거래했던 것을 감안하면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사실상 ARM의 독점 구도인 스마트폰 AP 시장에서 인수자는 공급 가격을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가 ARM을 인수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삼성전자가 100조원 이상 현금을 보유하고 있고, 적극적인 M&A를 예고한 상황이기 때문. 이 경우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 설계 능력에서도 시장을 주도할 여력을 갖추게된다. 그러나 투자규모에 비해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인텔의 몰락
인텔이 흔들리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의 보도대로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의 '직접 생산 포기' 선언은 그간 미국이 주도해왔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텔은 이미 앞서 수차례 7나노 제품 출시를 연기했다. 이번에 또 다시 미룬 건 양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다. 공정에서 수율을 확보하지 못해 양산을 미루게 된 것이다
인텔은 지난 30년 동안 업계 1위를 자리를 지켜 온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업체다. 인텔의쇠락은 2009년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인텔이 휴대전화 등 모바일 기기용 칩 대신 기존 개인용 컴퓨터(PC)와 서버 칩 사업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이 퀄컴 등 경쟁업체가 치고 올라온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시장에서 최신 공정 기술에서 한번 밀려나면 회복은 어렵다. 인텔이 TSMC를 따라잡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얘기다. 세계 반도체 선두기업이 흔들리고 있다. 시장 판도에 격변이 예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