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신문]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두번째 주인공은 피 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대표주자 현대가의 마지막 이야기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
‘왕자의 난’을 기점으로 시작된 ‘현대건설’의 새주인 찾기 ‘혈투’가 드디어 개시됐다. 때는 2010년 6월, 현대건설 채권단이 매각작업을 본격화하면서 승기를 잡기 위한 현대가 ‘쩐의 전쟁’ 최종판이 시작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범현대가의 좌장 정몽구 회장과 여전사 현정은 회장. 두 사람 모두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불태우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한 진검승부를 펼친다.
먼저 현정은 회장은 적통성을 무기로 현대건설 인수에 강력 의지를 피력했다. 왕 회장이 남편 정몽헌 회장에게 물려준 사업인 만큼 되찾아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2001년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겪을 당시 정몽헌 회장이 이를 회생시키고자 4400여억원의 사재를 출연했던 터라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는다’라는 명분이 강했다.
때문에 인수 후 시너지는 물론 현대건설의 추락한 위상을 다시 찾아주는데도 현대그룹에 당위성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대북 사업이 중단된 상태지만 다시 활성화 되면 현대건설이 맡을 역할이 많을 것이라는 게 현정은 회장의 바람이자 확신이었다.
사실 현정은 회장은 2003년 취임 이후 줄곧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강조해 왔다. 신년사에 빼놓지 않고 현대건설 인수가 최우선 과제임을 언급할 만큼 절실함이 단연 컸다. 현대그룹 매출의 80%를 책임지고 있는 현대상선의 지분 8.3%를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어 경영권 방어를 하려면 그 무엇보다 현대건설 인수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그동안 정씨일가로부터 끊임없이 경영권 위협을 받아왔던 터라 그 의지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반면 정몽구 회장은 경영능력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KCC, 현대중공업, 한라그룹 등 범현대가의 암묵적 지지를 등에 업고 기아자동차 인수 성공의 풍부한 경험을 강조했다. 적통성 문제 또한 왕 회장의 장자가 소유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적통성의 계승이라고 자부했다. 또한 10조원이라는 든든한 자금력과 정몽구 회장이 계열분리 전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점을 들며 현대건설이 안정적으로 시장에 재안착하려면 검증된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단 초반 판세는 정몽구 회장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현대차가 가지고 있는 10조원이라는 현금자금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이 대북 사업 중단 이후 재무구조개선 약점 대상으로 선정돼 유동성의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1조5000억원 정도의 자금이 전부였다. 때문에 외부에서 끊이없이 현대그룹의 자금력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현정은 회장은 오리혀 외부 차입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며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인수가도 현대차보다 4000억원이 많은 5조5000억원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 네거티브 전략으로 정몽구 회장을 압박했다. 무리수가 아니냐는 지적에도 현정은 회장은 거침없었다. 왕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모습이 담긴 3장의 흑백사진을 통해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라는 문구의 TV광고를 시작, 신문광고에까지 정몽구 회장을 향한 도발적 광고를 게재한다.
24개 중앙일간지에 일제히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을 기대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자동차 전문기업으로 키우고 노사가 힘을 합쳐 기술력을 높여간다면 우리도 세계가 부러워할 자동차 브랜드를 갖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 강국으로 기억되는 대한민국, 현대그룹이 함께 응원합니다” 라는 글로 입찰대상자 선정 전까지 신문광고 비방전을 강행한다.
“계열분리 원칙에 따라 현대건설을 지원할 수 없다” “현대건설을 인수할 여력이나 계획이 없다” “현대건설 인수를 검토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 계획도 없다” 등등 2000년 ‘왕자의 난’ 때부터 10년 동안 현대차가 발언해 왔던 말들을 나열, 광고 말미에 “지난 10년간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라며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비상장기업과 합병하지 않겠습니다. 시세차익을 노리지 않겠습니다. 경영권 승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로 현대건설이 정몽구 회장의 경영권승계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현정은 회장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무대응이 결국 화를 자초한 것일까. 11월 16일, 채권단은 현정은 회장에게 우선협상대상자라는 승기를 쥐어준다. 줄곧 정몽구 회장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터라 반전드라마 그 자체였다. 정씨일가의 대표주자로 범현대가의 파격 지원을 등에 입은 정몽구 회장에겐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역전패’였다. 그리고 이는 두 사람의 갈등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반전을 거듭한 ‘현대건설 새주인 찾기’
선제공격은 현정은 회장이 했다. 우선협상대상자가 발표된 직후 현대그룹의 자금력을 둘러싼 의혹 제기가 이어지자 현정은 회장은 소문의 출처가 현대차임을 확신, 현대차 관계자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현대그룹이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으로부터 끌어들이기로 한 1조2000억원에 대한 출처와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의혹에 대한 강경 대응책이었다.
정몽구 회장 또한 이번엔 맞고소로 팽팽히 맞섰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한 것은 물론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 앞으로 공문을 보내 “현대그룹과 외환은행간 양해각서(MOU)체결 과정에서 외환은행의 위법, 부당한 주관업무 수행 및 1조2000억원의 출처 등을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현정은 회장은 또 한 번 발끈하고 나섰다. “현대차가 적법한 대출임이 소명된 1조2000억원에 대해 출처조사를 요구한 것은 무고죄 및 입찰방해죄에 해당하는 만큼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맞불을 놨다.
하지만 현대그룹을 향한 채권단의 향한 불신의 분위기가 짙어지면서 채권단은 현대그룹에게 12월 14일까지 대출계약서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정은 회장은 끝내 그 출처에 대해 명확히 증명해 내지 못했고, 채권단은 결국 현대그룹과의 양해각서 해지안을 상정한다. 이에 현정은 회장은 강하게 반발, 양해각서 해지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지만 이 또한 법원 판결에서 기각돼 결국 우선협상대상자 자격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최종 인수자로 현대차가 낙점, 정몽구 회장이 승자의 자리에 꿰차 앉는 대반전극이 펼쳐진다. 2011년 1월 14일, 채권단은 현대차에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부여하며 MOU를 체결, 사실상 현대건설 매각작업 1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다.
지난 7년간 ‘현대건설 인수’라는 한결같은 꿈을 품어왔던 현정은 회장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뼈아픈 순간이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현정은 회장이 이와 관련해 대법원에 항고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현정은 회장은 항고를 하지 않는 대신 “현대상선 지분이 현대그룹으로 와야한다”며 화해 조건을 내밀었다. 현대상선 경영권 안정을 위해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분쟁 여진’ 여전…현대가의 앞날은?
정몽구 회장은 현대상선 지분을 통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좀처럼 두 사람의 얽힌 앙금을 풀기가 쉽지 않았다. 현정은 회장의 계속되는 화해 요청에도 정몽구 회장이 그럴듯한 리액션을 보이지 않아 경영권 분쟁이 현대상선으로 재 점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이어졌다.
왕 회장의 10주기 추모행사에서도 서로 악수만 나누고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아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또 왕 회장 선영 추모에도 불과 2분차이로 오고 가 만남을 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결국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우선주 발행한도를 현행 2000만주에서 8000만주로 늘리는 안건’을 상정하기 이른다. 대외적으로는 투자재원 마련을 위한 우선주 발행 시도였지만 진짜 속내는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범현대가 지분 비율(38.73%)을 줄이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현대그룹은 계열사간 출자 구도를 이루고 있어 계열사 중 한 곳만 경영권을 위협받아도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구조다. 그 중 현대상선은 지배구조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차지해 범현대가가 작정하고 지분을 모으면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이 당장에 위협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주요 주주인 현대중공업(23.78%), KCC(4%), 현대백화점(1.89%) 등 범현대가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범현대가가 보여 왔던 단합된 모습이 고스란히 연출된 것이다. 현대중공업, KCC, 현대백화점 측이 주총에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데다 찬성 위임장을 제출했던 현대산업개발이 주총 전에 위임장을 회수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특별한 이유 없이 우선주 발행한도를 확대하는 것은 주주가치가 훼손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현대그룹측은 “우선주 발행한도가 7%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며 “현대상선 경영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행위”라고 강력 비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화해의 물꼬를 틀 계기들이 곳곳에 있음에도 계속해서 엇나갔다.
그러던 지난해 8월, 현정은 회장은 장녀인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의 결혼식을 앞두고 현대차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민사 소송건에 대해 취하, 화해의 손길을 다시금 내민다.
그리고 이어 남아있던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에 관한 형사고소 고발도 조건 없이 취소한다.
현대그룹측은 “양 그룹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 앞으로 상호발전을 위해 노력하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건 없는 조치”라고 밝혔지만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경영권 안정을 위해 정몽구 회장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충분했다.
정몽구 회장도 일단 현대그룹에 제기한 맞고소를 모두 취하, 현정은 회장의 화해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전히 갈등의 불씨가 존재, 언제 또 피 튀기는 ‘쩐의 전쟁’이 시작될지 현대가를 둘러싼 분쟁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채권단에 제기한 3000억원대의 이행보증금 반환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계속 진행 중인데다, ‘시숙의 난’의 주인공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지난 2년간 KCC 지분 매각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해 나가고 있어 이 자금이 향후 어디로 향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몽구 회장이 현대상선 지분과 관련한 결단의 향배에 따라 현대가 좌장들의 운명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바람잘날 없는 현대가 ‘사투’의 종착역은 어딜지 사뭇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