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국의 중소 반도체 회사 리벨리온과 사피온 코리아가 합병한다는 소식이 외신에까지 크게 보도되었다. 사피온은 SK텔레콤의 자회사이긴 하지만, 그런 뒷배경만으론 설명이 안 된다. 자체 기술력으로 상용화 수준의 NPU(신경망처리장치)인 ‘X330’ AI 칩을 개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리벨리온도 ‘알토란’ 같은 강소기업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개발된 NPU인 ‘아톰(ATOM) 칩’을 개발해 양산에 돌입하기로 했다. ‘반도체’라고 하면 그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만 떠올리는 대중의 인식 너머 ‘숨은 강자’들이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분명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을 뒷받침하는 동력은 따로 있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이름없는 중소 반도체 사업체들이다. 대략 500개가 좀 안되는 이들이야말로 ‘K-반도체’의 엔진이며, 반도체 입국을 보장하는 전사요 일등 공신들이다. 어떻게 보면, 삼성․SK와 같은 대기업의 진정한 ‘갑(甲)’이라고 해야겠다. 그런 가운데 이런 예사롭지 않은 두 기업이 합병한다는 것 자체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외신이 보기에도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전문가들마다 “우리도 파운드리 외에 설계와 첨단 패키징으로 가야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고 당장 쉽게 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AI반도체 시대이다. 단순한 연산(演算, operation)에서 한 발 나아가 학습과 추론(inference)을 지원해 ‘초지능’을 창조한다는 세상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그 기술과 능력은 어떠하든 간에 이 분야에 도전하는 중소기업들이 국내엔 적지 않다. 테스트와 패키징, 설계, 재료, 장비, 부품, 설비 할 것없이 두루 작은 업체들이 망라하고 있다. ‘망라’한다기보단, 알아주는 이 없는 ‘고군분투’다.
AI 반도체 시대에 그들의 역할과 사명은 대단하다. AI 반도체는 시스템반도체에 속하되, 설계와 생산의 분업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 용도나 활용 분야가 다양하다보니, 획일적인 대량생산이나 ‘규모의 경제’만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국내 중소·중견 팹리스와 스타트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세계 AI칩 시장을 주름잡는 엔비디아나 AMD도 그렇고, 그 메모리를 공급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그 뿌리 아래엔 우리의 중소 반도체 업체들이 있다. 이들 글로벌 기업의 성과도 결국은 소규모 패키징과 소부장, 설계업체들로 된 모세혈관에 가닿을 수 밖에 없다.
국내 소규모 반도체 기업들은 그러나 그 길이 험난하다. 비록 정부가 때만 되면 ‘지원’을 외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들이 진입할 만한 컴퓨팅 기술을 연구하고, 첨단 패키징과 인터페이스 기술에 밤을 새곤 한다.
후공정 분야의 경우 정부 R&D 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보니, 중소기업 중심의 개발연구가 과반을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특히 ‘설계’가 중요하다. 가뜩이나 중소기업이 사람 구하는게 힘든데, 하물며 이 분야의 실무·고급인력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늘 ‘인력난’을 호소하면서, 모자라는 연구인력을 풀가동하고 있다. 반도체 미세화도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맞는 칩 제조 비용이나, 설계자산, SW 로열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시제품 개발에만 수 십억이 든다.
그래도 이들은 지치지 않는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에 대해 해외언론과 글로벌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가질 정도다. 그들만이 아니다. 국내 중소 반도체업체들은 엔비디아 영상 인식용 NPU나, AI 반도체 SoC, 테슬라 NPU의 5배 성능의 제품 등 엄청난 기술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피땀의 결과다. 로이터통신은 “리벨리온과 사피온 합병은 2~3년 내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을 제패하는게 목표”라는 국내 업계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전했다. 우리 중소 반도체 업계의 전투력을 보면 빈말이 아닌 듯 하다. ‘K-반도체’ 전사들의 건투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