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맥루한은 1964년 출간한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는 인간의 연장(extension of man)”이라고 했다. 가령 자동차 바퀴가 발의 연장이듯, 안경, 망원경과 같은 ‘미디어’는 눈의 연장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우리의 ‘촉각’이라는 감각의 확장이며, ‘피부’라는 기관의 연장이란 개념이다. 결국 ‘미디어’ 역시 인간이 터잡은 삶과 공간의 확장이다. 개인적 이유로 최근 필자도 한 비영리단체의 인터넷신문을 준비하면서 그런 맥루한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디어의 성패는 ‘인간’의 참여도에 달려 있다. 가령 미디어를 만드는 주체가 아무리 ‘고담준론(高談峻論)’의 훌륭한 콘텐츠를 전파한다고 해도 참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만든 사람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미디어를 ‘인간의 연장’이라고 설파한 맥루한도 분명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활발한 참여를 가정해서 이같은 주장을 했을 터이다. 더구나 그가 생존했던 20세기야말로 매스미디어의 전성기였지 않은가.
미디어의 성공을 위해 대중의 참여도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함께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 미디어가 되어야할 것이다. 한때 새로운 디지털문명의 이기로 각광받으면서 또다른 세상을 열어제칠 것만 같았던 홈페이지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홈피 숫자만 보면 줄잡아 수십만 개는 되지 않을까 싶다. 2000년대 초반 홈피 열풍이 불 때만 해도 이는 쌍방향 도구로서의 미디어로 손색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지금 홈피의 실태를 보면 사뭇 다르다. 대부분 ‘죽은 집(home)’이다. 쌍방향 소통의 전제조건인 참여도가 저조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들 땐 제법 활성화되어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집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참여 주체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황량한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뜻 ‘비주얼’이 그럴듯해서 혹시나 싶어 들어가 살펴보면 불과 몇 사람이 ‘놀고 있는’ 집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게 인터넷신문이다. 국내 인터넷신문은 등록된 숫자만도 1만개가 넘는다. 이 분야의 소프트웨어 개발업계도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열풍에 스스로 놀라워한다. 해당 업계의 전문가인 N사의 인상평은 새겨들을만 하다. “인터넷신문이 성공하려면 실핏줄과도 같은 풀뿌리 개체들(조직과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단다. 또 “오피니언 리더보다 풀뿌리 세상(사람)의 사소한 정보가 미디어를 살게 한다”고도 한다.
하긴 인터넷신문은 그 자체가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쌍방향 미디어로서의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튜버 등 움직이는 영상을 탑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지비용이 적게 든다. 조그만 건물의 승강기 점검 관리비 수준에 불과하다. 맥루한이 주창했던 ‘인간의 연장’이란 본질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인터넷 신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신문의 조건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인터넷신문을 발간하는 주체의 조직력과 열정이 얼마만큼 뒷받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첫 번째다. 또 시대정신에 맞는 신선한 발상과 열정이 얼마나 스며들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래서 세대를 뛰어넘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한 동기와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카테고리나 섹션, 레이아웃, 디자인과 같은 구성요소도 매우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론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활발한 의사소통의 장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곧 ‘공감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얼핏 보기에 우리는 지금 소통의 통로와 방법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AI까지 가세하며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콘텐츠의 홍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과연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이뤄지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유례가 없는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감보다는 설득을 위한 주장만 난무하고, 듣기 싫을때는 귀를 막는 선택적 소통이 지배할 뿐이다. 세대, 이념, 빈부 간의 벽은 견고하며, 대화 상대도 없는 ‘군중 속 고독’으로 길을 잃은 사람들이 대다수다. OECD국가 중 자살 1위라는 불명예도 다 이유가 있다. 아쉬운대로 인터넷신문을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부족하나마 작은 소통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서로 엿보면서 말을 건넬 ‘쪽문’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