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경제 김남주 대기자]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우리와 오랜 세월 은원(恩怨)으로 점철돼 왔다. 은혜 관계보다는 원한 서린 일이 더 많았다. 우리는 먼 옛날 삼국시대에 문자 등 많은 문화 혜택을 저들에게 줬다. 그런데 저들은 1592년 우리나라를 유린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왜란을 일으켜 우리를 짓밟았다. 결국에는 그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앗아갔다. 일본은 패전 후 한국 내전을 호기로 삼아 재도약의 틀을 다졌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이면에는 지근거리에 있는 우리나라가 많은 덕을 줬다. 몇해 전에는 소부장, 즉 소재 부품 장비와 관련해 수입규제를 해 우리를 애먹였다. 전화위복이라고 국내 기업들은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반도체를 등한시하면서 제조업 위주로 달려오던 일본에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디지털 방향으로 경제축을 선회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무라이 반도체’의 부활에 사활을 걸고 나선 양상이다. 우리에겐 위협 신호다. 일본과는 경제 문제 외에도 독도, 위안부, 해양오염수 방출, 징용피해자 보상 등을 놓고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어오고 있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해 내놓은 정보통신 백서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진행도는 48.4%에 그쳤다. 미국(78.6%)이나 독일(80.6%), 중국(88.3%)의 절반 수준. 이처럼 다른 선진국보다 뒤처진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일본 정부가 정책적 지원과 막대한 예산을 바탕으로 해외 정보기술(IT) 기업과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정책 전개는 글로벌 IT 산업의 거대한 흐름에 더이상 뒤처지면 안 된다는 절박감 때문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과거 일본의 저조한 IT 투자는 세계적 추세였던 디지털 전환의 시기를 놓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선 지난 2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일본 내 첫 번째 공장을 완공하고 운영에 들어갔다. 한때 50%가 넘었던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 미만으로 쪼그라든 일본 반도체산업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혁신적인 디지털 전환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구마모토 1공장 건립은 당초 4~5년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하나 공사 기간을 7000여 명의 인력이 24시간 3교대로 일하며 20개월로 단축했다. 1공장 투자비 1조3000억엔 가운데 4760억엔을 일본 정부가 지원했다. 일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요타자동차, NTT 등이 출자한 라피더스는 몇 년 후 2나노미터급 차세대 반도체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최첨단 반도체 제조를 목표로 하는 이 회사에 대규모 지원을 결정했다. 반도체 부흥에 정부와 기업이 팔을 걷어부친 것이다.
오픈AI는 이달 안에 일본 도쿄에 사무소를 개소하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오픈AI가 지난해 영국 런던,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무소를 연 데 이어 개설하는 세 번째 글로벌 사무소다. 첫 아시아 거점이기도 하다. 오픈AI가 첫 아시아 거점으로 일본을 선택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디지털 전환에 소홀했던 일본은 최근 글로벌 IT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지난해엔 자국에서 열린 주요 7국(G7) 정상회의에서 ‘히로시마 AI 프로세스’를 제안했다. AI를 활용한 딥페이크 정보나 개인 정보 침해 규제 등에 대한 글로벌 AI 규범을 주도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일본 행보가 디지털 전환을 향한 장기 포석으로 읽혀지고 있다.
일본이 디지털 전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글로벌 빅테크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IT 인프라 수요를 노리고 최근 일본 투자를 늘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해 일본 내 데이터센터를 확충해 생성형 AI 사업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할 방침을 밝혔다. MS는 ‘챗GPT’의 정보 처리를 일본 안에서 완결하는 방식의 정부 및 기업용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런 서비스는 미국과 유럽에 이어 일본이 세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처음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오는 2027년까지 일본에 약 2조3000억엔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데이터센터 증설과 운영체제 강화에 투입될 예정이다.
디지털 산업을 놓고 일본의 진격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 반도체 산업을 위협하고 우리 시장을 잠식해 들어올 태세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정책은 상대적으로 미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대기업은 설비투자를 할 때 투자금의 15%를 세액공제받을 수 있다. 올해까지는 한시적으로 10%의 추가 공제를 받는다. 이 정도의 정책 지원은 일본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란 평가다. 일본이 디지털 전환으로 일어서면 그 파급력은 우리에겐 태풍으로 번질 공산이 크다. 일본의 디지털 전환을 향한 대진격은 우리에겐 예삿일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