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가보면 요즘은 특히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창구 직원과 어르신 간의 다툼도 종종 보는 모습이다. 이에 반해 젊은이들을 은행 창구에서 보는 일은 상대적으로 드물어졌다. 왜 그럴까? 알만한 사람들은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이다. 모바일을 통해서 거의 모든 은행거래가 손바닥에서 이뤄지는 시대다.

모바일을 통한 거래는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구조조정을 압박하였고 그 결과는 직원을 줄이고 지점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모바일 거래는 은행의 단순 거래뿐만 아니라 증권, 담보, 부동산 등 모든 자산이 망라된 종합금융거래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일거에 피동형 소비자에서 능동형 결정행위자로 경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반면 디지털로부터 소외된 어르신들은 서러울 때도 있다. 은행창구에서 거추장스럽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은행직원으로선 사무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한다지만 이를 못 알아들은 노인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은행마다 고객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던 때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디지털 소외를 넘어 이것이야말로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개념의 ‘노인 학대’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노인학대는 가정폭력의 일환으로 취급되는 가운데, 경제적 빈곤이 가장 큰 이유라는 통계도 있다. OECD회원국 중 대한민국의 노인 빈곤율이 1위라는 오명은 10여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는 규정하기에 따라 그 종류도 갖가지다. “나이 든 사람 또는 상대적 의존자에 대한 학대”나, 신체적 구타, 돌보지 않음, 착취와 심리적 가해가 포함된다.

흔히 성인이 된 자손, 친척,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후견인 등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도 많다. 오죽하면 2006년, 유엔에서 매년 6월 15일을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로 지정했을까. 그런데 그 뿐 아니다. 디지털 소외야말로 또 다른, 아니 갈수록 새롭고도 심각한 ‘노인학대’가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디지털시대로 전환되면서 그 정도와 유형도 심각해진다. 종래 어르신 개인에 따라 가정폭력의 피해자로서 학대를 받던 것이, 이젠 ‘노인’이란 계층 전반의 성격으로 확대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앞서 예로 든 은행창구 뿐 아니다. 이젠 가정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혁신적 디지털화는 더욱 노인세대를 움츠러들게 하고, 세대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날로그와 오프라인에 대한 배제는 어르신들의 상실감을 더욱 짙게 하며, 고령 세대가 학대받는다는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대응책은 어떠한가? 물론 정책 당국이나 사회 공동체 차원의 고민이나 대응책도 아주 없다곤 말 못한다. 단지 그 수준이 그저 미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선 너도나도 어르신들을 업어라도 줄 것처럼, 온갖 노인정책을 홍보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표를 얻기위한 대증요법 이상 이하도 아닌 듯하다.

언론이라도 각성해야 한다. 캠페인이라도 열어서 디지털세상에 소외받는 사람들을 최소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언론이 정녕 ‘사회적 공기’를 자처한다면,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정책을 폄에 있어서도 거대담론으로만 접근하지 말라. 그 보단 구체화시켜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알기쉬운 모바일 은행 거래”를 안내하는 도우미를 공공일자리 창출차원에서 양성한다든가, 디지털화된 요양보호사를 소외가정에 보내 디지털기기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육을 할수 있도록 뒷받침하는게 그런 사례다.

어르신들도 본래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젊은 세대들을 위해 자신들의 인생을 조각조각 불태우며 살았다. 그런 만큼 디지털세상에서 소외받지 않을 권리와 존엄을 지니고 있다. 존중받아야 하고, 사회가 공경해야 할 구성원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어르신의 디지털 소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잖아도 ‘소외’야말로 우리사회의 중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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