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이<王忠里>는 경기도 양평의 조그만 마을 이름이다. 서울 강남쪽에선 퇴촌 국도를 타고 한 시간 안쪽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개울이 흐르고, 북쪽엔 남한강이, 남쪽엔 앵자봉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마을의 남서쪽인 능골과 웃 능골 사이 둔덕엔 마을 중앙의 개울을 바라보고 연안 김씨 선영이 있고 제법 큰 묘지들이 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마을 어린애들이 엉덩이에 깔고 앉을 수 있는 포대 자루나 널빤지, 함지박 등을 들고 나와 묘지 입구의 긴 경사로에서 눈썰매를 신나게 즐겼다. 봄, 가을 소풍의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가을 시제를 지낼 땐 전국에서 모인 도포 자락에 갓 쓴 유림(?)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40여 호의 조그만 마을에 연안 김씨의 시제를 준비하는 집(묘지기)이 세 가구나 있었다. 시제를 지내고 나면 시향 준비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봉숭과 제삿밥을 나눠주니 배고팠던 시절 잠시지만 허기를 채우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을에서 나고 자란 또래들에겐 연안 김씨 선영과 관련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왕충 선영엔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金自知, 예조판서를 지낸 金汝知 두 형제들의 오래된 묘소가 선친인 金濤(밀직제학)와 함께 있다. 두 형제는 연안김씨 시조인 김섬한의 6대손으로 세종의 충직한 신하였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王忠)도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잠들어 있는 묘지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만취당 김개국의 만취당 일기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왕충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양근 왕충이에 머무르며 족숙(族叔)께 봉정하다.

칠년전쟁에 도로가 막히니

천 리 먼 곳에서 존망의 운수를 양쪽이 서로 헤아리네

산속에서 이렇게 모이니 하늘이 도운 것을 알겠고

봄바람에 술잔을 잡으니 더디게 떠나기를 바라네

萬楊根王忠里 奉呈族叔

七戰干戈道路阻

存亡千里兩相疑

山中此會知天借

把酒東風欲去遲

임진왜란 후 만취당 김개국이 영주에서 양평 왕충이 선영에 참배하고 왕충이에 머무르며 족숙(집안 아저씨)에게 전한 칠언절구의 시조다. 이미 왕충이란 지명이 이때도 통용되고 마을에도 친척의 어른들이 주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빙하고 있다.

왕충이의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 길이 없지만 어린 시절 나고 자랄 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서울 내곡동에서 여주로 세종대왕의 능을 이장하기 전 유력지로 택한 곳이 두 형제가 잠들어계신 연안 김씨의 선영이었다. 이곳에 중앙정부 관헌들이 마을에 진을 치고 능자리를 팠는데 무수한 벌레들이 나와 이곳을 포기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 王蟲里(왕충리)라고 한다. 두 번째는 이곳에 자리 잡은 연안김씨 가문에서, 벌레가 나왔다고 허위로 진술, 선영의 명당을 지켰다고 하여 王蟲里(왕충리)로 지어졌다는 설이다.

세 번째는 세종이 아끼던 두 신하가 잠들어 있는 명당을 빼앗아 다른 곳으로 이장하게 하고 세종을 이곳으로 이장하는 것은 대왕의 뜻이 아닐 것으로 판단하여 포기하였다 하여 두 명신의 뜻을 기리고자 王忠里(왕충리)라고 지었다는 얘기다.

네 번째, 왕충이는 왕충+모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묘’의 토속어는 ‘모이’다. 곧 ‘대왕께 충성하는 신하가 잠들어 계신 묘’라는 의미를 지닌다. 왕충이는 곧 왕충+모이를 줄인 지명이라는 풀이다.

어찌 됐든 세종대왕과 두 신하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마을에 회자하니 나쁠 것 은 없었다. 나의 선친께서는 연안 김씨를 작지만 강한 ‘강소 명문’이라며 자부심까지 심어주시며 지명유래와 관련된 구전설화를 각인시켜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왕가와 사대부의 경계가 엄혹했던 시절에 임금 왕(王)자에 벌레 충(蟲)자를 입에 올릴 수 있었겠나 하는 의문이 든다. 다만 조상 대대로 마을에 기거하는 평범한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까지 막을 수야 없었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너네들 어디사니’라고 물으면 ‘왕충이 살아요’ 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므로 나는 ‘왕충+모이’→‘왕충이’라는 아름다운 토착어가 가장 마음에 들고 유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왕충이의 공식 행정 지명은 엉뚱하게도 旺倉里(왕창리)다. 일제 강점기 때 왕충의 왕자와 창촌의 창자를 짜깁기해서 만든 지명이다. 그러니 지명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는 사라지고 무의미한 지명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일제는 나라를 빼앗기도 했지만 방방곡곡에 널려있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지명을 말살했다.

세상은 변한다. 당연히 언어도 풍습도 지명도 변한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이란 본질까지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디지털은 일제가 말살하고 짜깁기한 아름다운 우리의 지명을 살리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디지털을 통한 ‘아름다운 지명 살리기 캠페인’이라도 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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