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에 신진서(22)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메이저대회인 농심신라면배, LG배, 춘란배 등 각 종 기전을 휩쓸었고 이 기세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2020년까지 세계 랭킹 1위였던 또 다른 바둑 스타 커제(25)와의 최근 대결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오고 있으며, 중국프로기사와의 대국에서 지난 해부터 한 번도 지지 않는 23연승째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신진서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동안 커제는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할 정도로 독보적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이 여세를 몰아 한국기원이 신진서와 커제의 10번기(番棋)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지난주 중국 바둑협회에 ‘신커 대결 제안서’를 발송했고 현재 회신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물밑에서만 떠돌던 ‘신커 대결’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한국기원의 제안서에 따르면 양국 1인자 대결이 두 나라 바둑계 발전과 바둑 세계화를 위해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①10번기 ②대면(對面) 대국 ③상금 승자 독식 ④상금 규모 100만달러(약 12억원) 이상 등 4항을 제시하고 있다. 바둑계에서는 명실상부 세계적 왕중왕전인 세기의 대국을 커제와 중국기원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바둑 애호가는 1천만 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금년 초 신진서가 농심배에서 4연승 끝에 우승컵을 들어올리자 숨가쁘게 바삐 돌아가던 대선 과정에서도 이재명 후보가 “바둑을 사랑하며, 축하드립니다” 제하의 SNS에 장문의 글을 올린 바 있으며, 본인도 “바둑 아마추어 5단 정도 되는 바둑광”이라고 밝힐 정도로 우리나라 바둑의 저변은 좁지 않다.
바둑은 현대인에겐 접근이 쉽지 않은 게임이다. 장시간을 요구하는데다 한 수 한 수 둘 때 마다 수 십 수 앞을 내다보는 두뇌 회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꾸준하게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지털화는 바둑에서도 고도로 학습된 인공지능 바둑기계의 등장을 부추겼다. 디지털시대의 바둑은 1:1이 아닌 (1:1):AI라는 신풍속도를 낳았다. 두 대국자 사이에 바둑기계가 등장한 것이다. 프로기사들의 과거 수십만 대국을 통해 고도로 학습된 바둑기계는 두 대국자 사이에 최적의 수, 최적의 경우의 수를 내놓고 있다. 물론 두 대국자는 자신들의 1:1게임에 몰입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바둑애호가들은 바둑기계를 앞에 두고 “(1:1) : 바둑기계”라는 흥미진지한 게임을 관전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단순한 1:1 게임이라는 장시간의 진부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바둑애호가들도 대국자를 통해 한 수 한 수 배워가는 고전적 방법에서 바둑기계를 통해 학습하고 있으며 프로기사들도 바둑기계의 승부와 학습을 통해 프로기사로서의 기량을 높이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디지털시대의 바둑기계는 이같이 바둑의 영역을 넓히고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디지털의 기본 단위인 1과 0은 우주에 존재하는 매우 익숙하고 오래되면서도 원초적인 부호다. 그 부호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초인적인 기술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세상에 새로운 창조란 없다. 단지 오래된 것들의 새로운 조합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곳이 바둑이라는 보드게임이 아닌가 싶다. 로버트 롤러는 “우주는 숫자의 조합이며 인식이란 숫자 속에 잠재한 형상을 상상해 내는 것”이라고 했다.
19×19=381이라는 바둑판은 우주다. 한 수 한 수의 응수는 인식이란 숫자 속에 잠재한 형상을 상상해 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이 인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형식의 중요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일관하는 형식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옳은 것이고 맞을지 모르나, 결국은 ‘인식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결론을 로버트 롤러의 경구에서 찾게 된다. 바둑, 특히 디지털 시대의 바둑기계엔 그런 함의가 깃들어있다.
